청와대를 뒤돌아서며 (67회)
  제9장 조달청에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조달청 차장 발령은 전천후로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내 ‘바벨탑’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의 밑바닥이었다.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백의종군하던 충무공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 ‘남아이십미득국(男兒二十未得國)’으로 둔갑하여 스물일곱의 나이로 형틀에서 이슬로 사라진 남이(南怡)장군의 분노가 이러했을까?

나는 청와대를 돌아서면서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화씨(和氏)의 옥’을 몇 번이고 생각했다.   

옛날 초나라의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산속에서 아직 갈지 않은 옥덩어리 하나를 캐내었다. 변화는 하도 신기해서 그 옥덩어리를 여왕(厲王)에게 진상했다. 여왕은 옥을 감정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감정시켰다. 

“전하, 이건 옥이 아니라 돌덩어리이옵니다.”
“응, 그래? 그 변화란 놈이 나를 속였구나,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내 이놈을 그냥 두지 않을테다.”

여왕은 그 분함을 참지 못해 사람을 시켜서 변화의 왼쪽 발꿈치를 자르게 했다. 변화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으나 다리를 절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여왕이 승하하고 무왕(武王)이 즉위했다. 변화는 그 옥덩어리를 감정인에게 감정을 시켰다. 

“전하, 이것은 아무데도 쓸데없는 돌덩어리이옵니다.”
“허허. 이럴 수가 있나. 돌덩어리를 들고 와서 옥덩어리라고 하다니. 이런 괘씸한 놈이 어디 있겠느냐. 내 당장 이놈에게 따가운 형별을 내릴 것이니라.”

사람을 시켜서 변화의 오른쪽 발꿈치를 자르게 했다. 변화는 이번에도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번씩이나 애매한 형벌을 받고 보니 옥을 옥이가 여기지 않은 사람들이 얄밉기 그지 없었다.

무왕이 승리하자 이번에는 문왕(文王)이 즉위했다. 그러나 변화는 이번엔 그 옥덩어리를 문왕에게 진상하지 않았다. 진상해봤자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화를 그 옥덩어리를 끌어안고 산 아래에서 사흘 밤 사흘 낮을 울었다. 눈물이 다 마르자 마침내 피눈물까지 솟았다. 

이 소문이 마침내 문왕에게까지 전해졌다. 문왕은 이 소문을 듣자 사람을 보내어서 변화가 왜 우는가를 물어오게 했다. 

“여보시오. 이 세상에는 발꿈치를 잘린 사람이 당신만이 아닌데, 왜 당신을 이렇게도 슬피 울고 있소?”

변화는 그때서야 울음을 그치고 그 까닭을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제가 이렇게 우는 것은 결코 발꿈치가 잘렸다고 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러면 또 다른 까닭이 있다는 거요?”
“예, 제가 우는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보옥(寶玉)을 돌덩어리라 하고, 성품이 곧은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문왕은 이 보고를 받자 당장 사람을 시켜서 그 옥덩어리를 갈고 닦게 했다. 그랬더니 정말 아름다운 옥이 되었다. 문왕은 그 옥을 ‘화씨의 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는 두 발꿈치를 잘린 변화의 이 고사를 생각하면서 청와대를 뒤로 하고 걸어 나왔다. 그러나 이 글을 적고 있는 그 순간에 되돌아보니, 비논리적인 중상모략은 최고의 찬사에 불과하다는 니체의 말이 수긍된다. 왜냐하면, 그 금융실명제가 오늘날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때의 주장이 일리가 있지 않은가라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나는 만 2년간의 청와대 근무에 종언을 고했다. 나는 그동안 새 시대 새 역사 창조를 위해 그리고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대단한 의욕으로 열과 성을 다했다. 밖에서 볼 때 청와대의 내 자리는 막강한 권좌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그러하기도 했다. 그것은 ‘청와대’는 나라의 역사와 겨레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산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1984년 어느날 산사(山寺)에서

청와대의 건강 여부는 곧 이 나라의 발전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그럴수록 내 어깨에 걸린 국민들의 기대와 염원의 무게를 뼈저리게 의식했다. 나름대로 혼신을 다해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청와대 근무는 기실 5공화국의 출발시기였다. 

당시 내가 일했던 <국보위>는 재무분과위원회의 일은 아니었지만, 당시 정부의 일에는 삼청교육대처럼 무리한 정책도 적지 않았고, 무고한 기업과 개인이 억울한 피해를 당한 사례도 적지 않음을 나 역시 잘 안다. 비록 내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그때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그때 억울함을 당했던 모든 분들에게 지금도 죄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기실 내가 그때 청와대에서 큰 권한을 가졌으면서도 2년 만에 나오면서 뜻하지 않은 한직으로 발령이 난 것은 내 업무스타일이 고지식하고 원칙에 매달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만 변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심으로 당시 정부 고위공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를 구하고 싶다. 

뜻대로 되었을 때에 실의의 슬픔을 생각한다. / 得意時使失意之悲

뜻을 얻어 권좌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뜻을 잃고 비운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나는 이 좌우명을 때때로 음미했다. 권불십년이요,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며, 풀잎이 찬란한 이슬도 아침 해가 뜨면 사라지고, 인간만사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것을 내 인생관리의 덕목으로 삼았다. 이 빛나는 자리에 몸을 담았기에 나는 뭇사람의 귀감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에 나이 행동거지에는 엄청난 자제와 채찍이 가해졌다. 

고향의 선영(先塋)도 소분하지 못하고, 집과 사무실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단순반복을 했다  가끔 생각나는 누룩 술도 끊고, 옛 친정인 재무부에는 근친 한번 가지 못했다. 만 사람이 부러워하는 화직(華職)인데도 가장 실권 없는 공무원으로, 나는 좁다란 행동반경 속에서 오직 내 땀과 지혜를 쏟아 부었다. 

그러고 보니 청와대의 2년간은 업무상은 물론, 정신적으로나 건강상으로나 내 인생 3-4분기까지에 가장 어렵고 힘든 시집살이였다. 그러나 온갖 희비가 엇갈린 공직생활의 터널을 빠져나온 이 시점에서 볼 때, ‘역사의 아이러니’를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역사가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그 출범 때는 거창하고 요란하다가 그 종국에 가서는 예외 없이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끝나버린다는 아이러니였다. 

저 진(秦)나라를 보아라. 분열과 부패와 무능을 다스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그 3대에 또한 그 부패와 무능으로 망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상자(商子)>란 형법 5권을 저술한 위(衛)나라 상앙(商鞅)은 스스로도 그 법에 의해 처단되었고, 프랑스 혁명 때 길로틴이란 참수대를 발명한 길로틴도 마침내 그 길로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는 인간역사의 영고성쇠(榮枯盛衰)와 더불어 순환되는 것인가. 이것을 일러 역사순환법칙이라 하던가.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하늘의 성좌를 부정하고 비산(砒酸)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 헤겔의 변증법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도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나간다는 그 위대한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아이러니의 역기능보다 그 아이러니의 정체를 직관하고, 이 아이러니를 몰고 오는 태풍의 눈을 빼는 괴력의 삼손이 될 때 그 역기능보다 더한 국태민안의 요순(堯舜) 천지가 도래한다는 진리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코미디프로 정화안과 금융실명제 파동 (66회)
  조달청의 평지작업 (68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