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달청의 평지작업 (68회)
  제9장 조달청에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1982년 12월 23일자로 조달청 차장으로 임명이 되었다. 

조달청은 알기 쉽게 말해서, 시정(市政) 물가를 조사해서 그 상하가격을 감안한 기준가격을 정해주어 공정거래가 되게 하고, 다량구매의 이점을 살려 인력과 예산을 절감하게 해주고, 전문인을 통하여 공정 입찰로 공사계약을 하여 정실계약이 안되게 하며, 외자물자 도입도 그 중재를 맡는다. 

한 집안의 살림살이도 이와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활설계가 이상적이라고 해도, 광이 넘칠 만큼 재물이 풍요롭다 해도 이 재산을 잘 관리하고 규모 있게 사는 데는 공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조달청은 나라살림에 하는데 필요한 그 법도를 세우고, 그 법도대로 살아가도록 앞장선 리더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법도가 흔들리거나 공평을 잃을 때 진시황의 아방궁도 석숭(石崇)의 주지육림(酒池肉林)도 하루아침에 움도 싹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오월설화(吳越說話)>에 실린 초나라의 오자서(伍子胥)의 생각이 떠오른다.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어느날 절세가인 서시(西施)를 총애하고 있는 목전에서 오자서가 아랫도리를 둥둥 걷어 올린 채 황새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부차가 대로하여 이를 잡아다 문초했다. 오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 이 눈부신 금전옥루(金殿玉樓)도 3년이 못가서 이슬이 내린 풀밭이 될 것이옵니다. 신 그때를 생각해서 옷이 젖지 않는 조련을 이렇게 미리 쌓고 있는 중이옵니다. 

이때 찬란한 궁전과 처량한 황야는 대조가 된다. 오자서는 이런 대조법으로 주색에 빠진 부차를 깨우쳐주었던 것이다. 


이 오자서의 충고는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을 가도, 천금 같은 교훈이 되리라 믿는다. 조달청은 내가 부임하자 마치 초상집처럼 들끓고 있었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외미(外米)도입 의혹사건과 저질무연탄 수입사건, 시설공사부정 입찰사건 등과 관련된 20여명의 공직자가 구속이나 입건이 되어 있었다. 그 외미 도입사건은 항간에 줄기차게 물의를 빚은 사건이어서 잠깐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흉년이 들어 부득이 미국으로부터 쌀을 도입해야 할 다급한 형편이었다. 조달청은 <코넬사>와 <코메트사>에 도입미에 대한 경쟁입찰을 시켰다. 입찰을 받고 보니 <코메트사>가 싸게 응찰하여 조달청은 이 쌀의 도입선을 <코메트사>로 낙찰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때 공교롭게도 미국 본토에서 사단이 일어났다. 곡창주인 켈리포니아주에서 쌀을 매점매석하고 나섰다. 이 바람에 <코메트>사는 한국으로 수출할 쌀의 분량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달청은 이 사정을 인정하여 부득이 몇 차례나 그 계약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뜻밖에도 이렇게 꼬이게 되자 입찰에서 패한 <코넬사>가 소갈머리 고약하게 생트집을 잡아 물의를 빚었다. 한국정부가 그 <코메트사>로부터 정치자금 600만 불을 받았기 때문에 눈을 감아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외국상사가 문제를 제가하자 그것은 국내에 금방 파급되어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켰다. 따지고 보면 나의 조달청 차장 발령도 이런 사건과 함수관계에 있었다. 대통령 사정비서관이 차장으로 부임해서 이 사건들을 수습하고, 정상궤도에 올리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명분과 이유야 어떻든 나는 공무원은 어디를 가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공복이란 최대 공약수를 되찾도록 노력했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대통령과 한 고향인데 너무했다고도 했다. 농담이겠지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위안은 자가당착의 위안이었다. 생각하여 보라. 청탁이나 부정을 배격하자는 주무부서에서 일한 사람을 그런 지연으로 대통령이 어찌 선심을 베풀 수 있겠는가. 
 
▲ 김준성 부총리로부터 조달청 임명장을 받고 있다

나는 이런 어수선한 가운에 부임을 했다. 이런 때일수록 내가 함께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심지를 굳건히 자았다. 더욱이 3년간 ‘국보위’, ‘입법회의’ 사정업무 등 소위 권부에서 일 해왔기에 갑작스러운 힘의 공백에서 오는 난관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철저히 근신 자중했다. 골프도 중지하여 등산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늘 도시락을 지참하고 다녔기에 ‘도시락차장’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청와대 등 권부와의 접촉도 자제하고, 철저히 ‘나 혼자’란 보호막으로 자기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면서 1차적으로 위에서 말한 각종 사고 관련자들을 책임지고 최대한 관용처리 했다. 처벌이 능사만이 아니라 재기용할 때 그들이 쏟을 땀과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예상은 적중되었다. 그들이 새로이 내뿜는 그 열은 마침내 나를 감동케 했다. 모두들 속된 말로 “센 부서에서 오신 분이라 역시 그릇이 크고 세다.”는 찬사까지 보냈다. 

이 조달청에서 재임 시 내가 노심초사할 몇 업무에 대해서 회고해보기로 한다.    

직원들의 정신교육

나는 일련의 의혹사건을 처리하자 이어서 조달청 공직자들의 정신교육에 전 신경을 집중 했다. 직원의 의식개혁 없이는 또 다시 영예롭지 못한 전철을 밟기 쉽다는 나의 노파심이요, 아랫사람 사랑의 내 자그만 정성이었다. 그와 동시에 큰 변고를 겪은 뒤라 정신이 더 위축되어 무사안일부의와 무관심으로 넘어갈 우려마저 배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이위해 장내 직원들의 교육에 임했다. 

“여러분, 조달청은 다른 부서보다 유혹이 많은 관서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보든 말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관리햬야 합니다. 나는 요즈음의 좌우명이 ‘윤리, 도덕성, 정당성의 바탕 위에서 신과 양심 앞에 떳떳하게 처신한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가문과 가족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 개인은 그 가문이나 가정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지위나 연령에 관계없이 내 위치는 쥘 부채의 ‘사북’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위로는 부모와 아래로는 자녀와 옆으로는 내자와 서로 끊을 수 없는 끈끈한 걸림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의 귀한 아들이요, 옆으로는 하나밖에 없는 지어미의 남편이요, 아래론 아이들의 소중한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한 웅큼의 금전적 유혹에 잘못 말려들어서 가문에 더러운 이름을 끼치고, 처자식들까지 떳떳하게 얼굴을 못 들게 한다면 그보다 더큰 치욕과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나 개인도 잠시 동안의 판단착오가 걷잡을 수 없는 전략의 비극을 몰고 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코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떳떳하게 세상을 건너야 합니다. 우러러보나 굽어보나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때, 하늘은 언제나 우리 편이 됩니다.”

직원 개개인의 이해에 호소한 나의 정신교육시간은 이런 식으로 시작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나라 안팎의 정세,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의 열쇠, 우리의 복무자세 등 다양한 내용으로 운용되었다. 풍부한 예화를 곁들인 이 교육시간은 직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듯 했다. 

 
  청와대를 뒤돌아서며 (67회)
  직원들의 사기진작 (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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