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핑방지 위한 저가심사위제도 (70회)
  제9장 조달청에 해는 뜨고 해는 지고

대통령의 격려를 받고 청와대를 다녀온 후 일차적으로 착수한 사업이 <냉동창고>와 <저온창고>의 운영이었다. 그때까지 정부 예산으로 세운 냉동창고와 저온창고가 인천에 있었으나 그 운영은 민간인에게 위탁하고 있었다. 이것을 우리 <조우회>에서 맡아 비축물자를 관리 운영하여 그 이득금을 조우회에 적립했다. 

이 사업에는 즉각적으로 거센 거부반응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까지 운영을 해온 수탁자와 사업성공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보수적 공무원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들도 마침내 공적(公的)이요, 목적이 선명한 우리들의 사업에 더 이상 색다른 토를 달지는 못했다. 

이 조우회는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때 참으로 값진 단행을 했다고 자부하며 큰 보람을 느낀다. 왜냐하면, 현재 연가 3, 4억 정도의 이익을 올리고 있다는 결산소식을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 당시 대형 정부 공사에 덤핑입찰이 성행되어 직접공사비에도 미달되는 낮은 선으로 낙찰되는 경우가 많아 부실공사가 매우 우려되고 있었다. 최저가격 낙찰제가 실시된 1983년 4월 1일 이후 1984년 4월말까지, 조달청이 발주한 예정가격 30억 원 이상인 대형공사 64건 중 20여건이 예산액 대비 60% 미만의 낮은 가격으로 낙찰되었으며, 그 중 2건은 30% 미만으로 낙찰되었다. 

왜 이 같은 덤핑 낙찰이 성행되고 있었을까? 그것은 중동건설경기가 침체되면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건설업체들이 우선 눈앞의 불을 끄기 위해 원가 이하로라도 입찰하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건설행정 당국도 공사를 낮은 가격으로 마치는 것이 예산절약이 된다고 여긴 나머지 공사를 얼마나 튼튼하게 해명하게 하며 얼마나 건실하게 했는지에 대해선 소홀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부실공사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원리적으로 보면 건설업자가 아무리 덤핑입찰을 한다 해도 정부로서는 감리만 철저히 하면 되는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문제를 파생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아무리 감리를 철저히 한다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 업자가 큰 손해를 보면서 출혈공사를 하는 것도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소망스럽지 못한 일이다. 

정부는 정당한 가격을 주고 백세에 남을 수 있는 훌륭한 건축물을 지어야 하고, 건설업자는 건실한 공사를 하고 적당한 이윤을 얻어 착실히 성장 발전해야만 나라 경제가 튼튼해지는 것은 불을 보는 것보다 뻔한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어떻게 하든 과도한 덤핑을 방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설령 당위성은 그렇다 해도 현실적으로 이를 어떻게 방지하느냐가 큰 난제였다. 

이러한 차에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등 관련 부처에서 덤핑방지를 위한 ‘저가심사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예산회계법개정안’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조달청에 저가심사위원회를 두고 위원장은 조달청 차장이 되어 입찰내역을 분석한 뒤 덤핑이라 인정될 경우에는 이를 낙찰대상에서 제외하자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럴 듯했으나 실제로 집행에 옯길 경우에는 대단히 난감한 제도였다. 왜냐하면, 그 다양한 공사, 그 다양한 입찰내역 중에서 덤핑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인가. 덤핑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심사기준을 정한다 해도 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업자들이 과연 납득을 한 것인가, 실로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1984년 조달청 차장 시절 업무를 받고 있다

잘못하다가는 집행관서의 실무책임자들만 골탕을 먹고 다칠 것이 뻔했다. 그러므로 조달청의 관련 국ㆍ과장 모두가 실현불가능한 제도라고 반기를 들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반대의사를 명문화하여 관련주무부처에 제출했다. 그런데 이 개정안은 국무회의에서 한 달 이상 계류되었다가 결국은 통과되고 말았다. 

사실 이때 나는 여러 경로로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조달청 차장이 반대해서 국무회의에서 한 달이 넘도록 안건이 계류되기는 처음이라는 농수산부차관의 전언을 듣기도 했고, 당 재정위원장이 최고 권력자를 모시는 저녁 자리에 초대되어 이 사안과 관련해서 회유가 있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받은 술잔을 입에 대기만 하고 마시지는 않으면서 소신에 맞는 태도를 유지했다. 뒷날 출근하니까 청와대 부속실장은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박판제는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더라. 대단한 놈이다.”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울며 겨자먹기로 저가심사위원회는 구성되었고, 나는 초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걱정이 앞섰다. 어떻게 심사할 것이며, 어느 선, 어느 기준으로 덤핑이냐 아니냐를 정하란 말인가! 회사마다 사정이 다르고, 공사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었다. 회사의 자산상태, 기술축적상태, 인력의 숙련도 등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요소에 따라 그 기준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한없이 고뇌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사무실에서나 집에서나 출근하면서 퇴근하면서 오로지 이 문제만을 위한 묘안을 찾느라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나의 가느다란 광명이 내 가슴을 비쳐주었다. 나는 드디어 무릎을 탁 쳤다. 이것이면 최소한의 기준은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이면 모든 당사자와 그 복잡한 요소를 모두 감안한 최대 공약수가 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것은 바로 ‘직접 공사비’를 기준으로 하여 그 미만은 덤핑으로 간주하여 무조건 탈락시키고, 그 이상 선에서 최저입찰자를 낙찰자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전문용어이지만 총 예정가격은 “직접공사비+간접공사비+적정이윤”으로 구성된다. 어떠한 기업도 특정한 공사에서 이윤을 포기하는 것은 경쟁인 한은 납득할 수 있다. 간접공사비의 포기도 회사의 능력에 따라서는 납득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공사에 직접 들어가는 자재비와 노무비 등의 직접공사비까지 포기한다는 것은 기업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나 결코 현명한 짓이라 할 수 없다. 

사실은 이것도 직접비를 기준으로 하는 경쟁이란 비난과, 직접비 알아맞히기 경쟁이라든가, 직접비에서 1워만 모자라도 탈락된다는 등 많은 모순과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 기준 없이 하나하나 심사하여 결정하다가는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공무원들이 견뎌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마침내 1984년 5월 9일, 조달청은 주택공사의 광명 철산지구 대지 조성공사에서 예정가격 대비 43.3%로 최저 입찰한 모 입찰자를 덤핑으로 규정해 낙찰대상에서 제외하고, 직접비 이상에서부터 저가 입찰순위 12위인 다른 입찰자에게 이 공사를 대신 맡겼다. 

이런 사례는 그 이전에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입찰 때의 일이다. 응찰한 건설업체 중에는 입찰가격 1,000환을 써 넣은 업체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시내에서 인도교까지의 택시요금도 4,000환이었는데 단돈 1,000환으로 소위 ‘기부공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응찰 두 번째로 낮은 가격 2억3천만 환을 써낸 <현대건설>에게 낙찰이 되었다.
 
과거야 어떻든 현실적으로 직접비 미만이라 하여 43.3%가 어떻게 해서 덤핑이라 할 수 있는가 하고 낙찰대상에서 탈락된 업체로부터 강력한 항의가 있었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조달청을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제기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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