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구월심(日久月深), 염원은 무산되고 (71회)
  제9장 조달청에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조달청에 대한 행정소송은 마침내 올 것이 오고 만 것이었다. 내가 이 제도를 채택하려고 할 때 그렇게도 반대했던 그 우려가 현실로 바로 내 앞에 닥쳐왔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불가피하게 닥쳐오는 위기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다해 최선을 다했다. 주어진 상황과 조건 하에서 공직자로서 사심 없이 정당하게,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입찰 대상에서 탈락된 기업에 대해서 신과 양심 앞에 맹세코 추호의 선입견이나 의도된 작위는 없었다. 

그 당사자가 내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장자(莊子)의 말을 빌릴 필요가 없다 해도, 이 세상엔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은 없는 법이다. 항상 상대적이다. 우리가 한번쯤은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아량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

어떻든 이 일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그 뒤부터는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심사제도는 큰 어려움 없이 정착되었다. 

나는 우리 정부도 건축물 공사에 충분한 가격을 주고 최고로 지어 후손들에게 영광으로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항상 주장했다. 싼게 비지떡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 제도의 정착으로 서초동에 있는 법원청사와 예술의 전당, 과천대공원 내 국립현대미술관과 대덕에 있는 국립중앙과학관 등은 우수업체를 골라 제한경쟁을 시켜 90%이상 낙찰률로 지은 건설하고 자랑스러운 건축물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골치 아픈 사건, 사고도 제대로 수습이 되고, 청(廳)이 안정을 되찾고, 약간은 하는 일에 보람과 성취감에 젖어 갈 때였다. 청장(김주호 청장)이 바뀌어 두 번째 청장(김만기 청장)을 모시게 되었다. 

새로 부임해온 김만기 청장께서는 그동안의 내 노고에 대해 여러 가지로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과분한 칭찬을 했고, 너무 오래 조달청에서 수고를 했으니 영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들려올 때마다 나는 송구스럽고 참으로 고맙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기관의 장이 새로 부임해오면 대개 어느 정도 안정이 될 때까지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통례인데, 자기 불편여하에 관계없이 부하의 장래만 위해주는 그 따뜻한 배려와 큰 도량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사실 엘리트의식에 꽉 차 있는 우리 공직사회에서 피곤한 경쟁을 해온 나로서는 드물게 느껴보는 흐뭇한 인간관계였음을 회고해본다. 

솔직히 말하라면 나 역시 조달청에 온지도 3년이 넘었으니, 내 원래의 친정인 재무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었겠는가. 자화자찬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몹시 고생했고, 주변의 평가도 좋았다. 그 전에는 조달청의 불미스런 기사가 자주 신문지상을 장식했지만, 그 몇 년간은 그 같은 기사는 전혀 없었다. 

이것이 전적으로 내 공로라 할 수는 없어도, 나는 분명히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국보위’때 차출되어 나온 위원 중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 부처로 돌아갔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냉혹했다.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바라던 나의 염원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3년 6개월 동안 정들었던 조달청을 떠나 환경청 청장으로 발령이 났다.    

▲ 조달청 차장 시절 현장시찰 / 오른쪽에서 3번째가 필자이다 

내가 환경청 청장의 발령을 받은 것은 1986년 5월 24일이었다. 

부임 1년 전인 1985년 8월 12일엔 일본 나가노현[長野縣] 산악지대에서 520명이 사망한 JAL기가 추락되었다. 9월 19일엔 멕시코에서 진도 8.1의 대지진이 일어나 28,000여 명이나 사망되었다. 그 다음날인 9월 20일엔 남북적십자회담의 성공으로 이산가족 각각 50명씩이 서울, 평양을 교환 방문했다. 

11월 6일엔 소련의 KGB 유르첸코의 망명소동이 있었고, 11월 13일엔 콜럼비아 화산이 폭발하여 20,000여 명이 사망했다. 11월의 19, 30일 양일간엔 제네바에서 레이건과 코르바초프의 미ㆍ소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말하자면 이 해는 동서냉전의 벽이 차차 무너지기 시작했는가 하면, 천변지이(天變地異)와 AIDS에 43개국 15,000여명이 감염되어 생명을 앗아가는 이율배반적인 해이기도 했다. 

1986년에는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개최되어 우리나라가 27개국 중 당당 2위를 차지하여 국위를 사해에 떨친 해이다. 그런가하면 북한의 금강산댐의 수몰공세를 대비한 소위 <평화의 댐>공사를 기공한 해이다. 그러니까 이해야말로 희비가 엇갈린 해이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환경청청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참으로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돌발적인 발령이었다. 조달청 차장으로 3년 반이나 있다가 겨우 빠져나온 게 환경청장이라니 맥 빠지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관세청장으로 발령이 나서 언론에 보도도 되고 청와대에서 축전도 받았는데, 어찌된 곡절인지 하루 만에 환경청장으로 다시 발령이 났다. 

1986년 5월, 환경청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솔직히 환경청이 무엇 하는 곳인지도 확실히 몰랐다. 게다가 환경청은 보건사회부 산하기관이었는데, 두 곳 다 구성원 중에 아는 분이 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의아해하는 분위기였다. 

“환경에 관한 문외한이 환경청장으로 오다니! 무얼 알아야 면장을 해먹지!”

어떻게 할 것인가! 절해고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차장이 고시 3년 선배여서 그것도 난감했다. 

그러나 나는 나름대로의 환경철학은 있었다. 그것은 생활주변에서부터, 매주 등산으로 접한 대자연의 위대한 교훈이었다. 

“옳지 않으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이 꾀꼬리야.”

나는 일본의 덕천가강[德川家康]의 그 느긋하고도 인내심이 강한 인생관을 그때 조용히 되뇌었다. 나의 자연관을 말하기 전에, 모씨의 수필 ‘산제 제문(山祭祭文)’을 여기에 먼저 소개한다. 

영명하신 산신령님, 소소응감(昭昭應感) 하옵소서. 

여기 정사년(丁巳年) 시월 상달 대리월 대리일(大利月 大利日)에 제수를 갖추어 삼가 영전에 절하오니 화위동심(化爲動心) 하옵소서. 

예로부터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고 일러옵니다. 그러하옵기에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를 웃었고, 맹자도 구덩이를 채운 다음에야 흘러나가는 저 물의 철학을 칭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부터 산은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요, 물은 우리들의 다정한 길잡이였습니다. 

천군만마를 거느리는 쾌승장군처럼, 창궁(蒼穹)을 외연(巍然)히 찌르고선 높은 산봉우리. 그러나 다정도 할손, 그 무릎 아래 다독거려 놓은 천 이랑 만 이랑 굽이치는 골짜기 만산홍록(滿山紅綠)에 백조(白鳥)가 풍악(風樂)을 울리고, 계곡을 씻어 옥을 울리는 벽계수(碧溪水)는 산의 낭랑한 목소리입니다. 

이 유한 듯 강하고 강한 듯 유한, 산의 우람한 기품에 우리는 인생을 건너는 법도를 배웁니다. 아름답게 뻗어나간 끝없는 능선에서 우리는 인생의 여유를 배웁니다. 누항(陋巷)의 오욕칠정에 때 묻은 육신을 거느리고, 산의 따스한 품속에 들어서면 안으로, 안으로만 천년 합묵(含黙)을 지키시는, 그 숭엄한 수훈으로 우리들의 행동거지를 배웁니다. 그러나 아직도 산의 육중한 숨소리에 낚여 자연의 뒤안길을 돌라치면, 먼저 묻은 우리 인생이 누더기처럼 꾀죄죄하고, 헛 살아온 우리 과거가 부끄럽도록 무색해집니다. 

영명하신 산신령님! 우리 모드 오늘 이 자리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산을 배우고, 산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부디 칠색 영롱한 무지개를 타고 강림하시와, 숭고한 야성을 배우는 이 산사람들을 길이 인도하옵소서.

그러나 이 위대한 우리의 스승인 ‘대자연’이, 오늘날 아귀센 인총(人叢) 때문에 큰 몸살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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