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와 반성의 창 (91회)
  제12장 내 인생의 오늘과 내일

문득 정신없이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오직 공직만을 위해 충직하게 일해 온 내 청춘이 아깝고 안쓰러워졌다.  

‘조국이여, 국민이여, 내 꽃다운 청춘을 돌려다오. 물 때 좋은 생선처럼 기운이 팔팔하고, 모든 가능성이 약동하던 내 청춘을 돌려다오. 황금과 권세로도 살수 없는 내 소중한 청춘을 보상하라.’

내가 울적하여 누룩에 취하면 곧잘 내 잠재의식은 이처럼 입술을 딛고 터뜨려진다. 그 흔한 청춘의 낭만도, 그 지천의 향락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미련 없이 불살라 버렸다. 

한때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이 조그만 우거 속에 밀폐되어 버렸다. 나를 첩첩이 그리고 철저하게 가두어버린 저 벽(壁)! 벽! 벽!

이 벽속에 갇혀버린 영원한 죄수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그 벽을 무너뜨리고 내 결손된 청춘의 보상을 찾을 것인가! 그것이 내 현실에 던져진 최대의 문제였던 것이다. 

'창밖에는 자정을 넘었는데도 아직도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등불을 돋우고 앉았으니, 지난날의 생각이 만 리나 뻗치는구나!'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증자(曾子)는 하루에도 자기의 몸을 세 번이나 돌아보았고(吾日三省吾身), 장자(莊子)는 50이 되어야 49세의 잘못을 안다(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고 했다. 비록 만시지탄은 있으나 그동안 국록을 먹으면서 내가 몸담았던 일들을 비추어 그 잘잘못을 돌아보기로 한다. 단 주(周)나라에도 삼유(三宥)가 있어 불식(不識), 과실(過失), 유망(遺忘)의 경우는 그 죄를 묻지 않았으니, 솔직한 심정으로 되돌아보기로 한다. 

나는 항상 국가와 국민 전체의 입장에 서서 원칙론을 내세워왔다. 그동안 나는 부실기업정리, 기업공개, 9.27조치 등 국가적 이슈였던 역사적인 일들을 직접 내 손으로 다루어왔다. 이런 일들은 대체로 기존 질서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일대 수술이었다. 그래서 이 수술에는 두 방면에서 오해와 시기를 받기도 했다. 

기존 질서 하에서 심각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 명분, 어떤 설득력에도 아랑곳없이 실상과 다른 왜곡된 인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면서도 큰 일들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각광을 받게 되면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심리도 쌍심지를 켜는 사람들도 가끔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의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타협과 양보를 하지 않았다. 일의 성격상 조그만 양보와 타협도 결국 전체를 망쳐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항상 본의 아니게 고집에 세고 타협할 줄 모르는 강성인사로 몰리곤 했다. 

그러나 이 개운 찮은 오해의 꼬투리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대아적(大牙的) 견지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다소의 잡음은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나의 결벽증 비슷한 성벽(城壁)이 고독을 자초한 것 같았다. 나는 윤리 도덕상 정당성의 바탕 위에 신과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좌우명으로 삼아왔기에 일종의 결백증 증후까지 있는 듯 했다. 

세상 인심이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인정을 주고받아야 ‘함함’ 하는데, 나는 본의 아니게 팔자소관이라고나 할까, 큰 개혁조치들에 휘말려왔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융통성 없는 인간도 아니었는데, 그 환경과 업무의 성격상 스스로 엄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2010년대 도산서원에서

이로 인해 나는 “깐깐하다.”, “고집불통이다.”, “인정도 눈물도 없는 목석인간”이란 억울한 별명까지 얻었다. 이러한 오해는 나의 현실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가령 내가 외로울 때나 곤경에 처해졌을 때도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은 가물에 콩 나는 듯 했다. 

그야말로 “정승 죽은 데는 안가도 정승 말 죽은 데는 간다”란 예부터 전해오는 속담이 현직에 있을 때부터 자주 실감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일에 쫓긴 나머지 그리고 그 일들의 성격상 사람을 정주고 마음 주면서 사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오늘의 고독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솔직히 반성한다. 

나는 특정한 인맥 형성에 끼지 못했다. 

나는 자나 깨나 주어진 소임은 완수하려고만 했지, 윗분의 마음에 들도록 교언영색을 하거나 승진 부탁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제일 젊은 과장, 제일 젊은 국장, 제일 젊은 1급 고위직, 제일 젊은 차관급으로 승진을 하기는 해도,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본인이 이해할 수 없고, 상상도 못할 승진과 전보였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어디 찾아다닐 필요도 여가도 없게 되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흔히 말하는, 서로 보아주고 밀어주는 인맥형성과는 무관하게 되어버렸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는 대단히 화려하게 보였는데, 실인즉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빠진 호랑이처럼 소외감과 고독감과 무력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다음과 같은 정신당(鄭信堂)의 꿋꿋한 선비 기질을 좋아한 탓이라 치부하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다. 

조선 중흥 때 정신당이 청송 부사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그의 친구이며 영의정이었던 성희안(成希顔)이 편지를 보내어왔다. 그 편지 사연을 읽어보니 잣과 맑은 꿀을 구할 수 없겠느냐는 편지였다. 

정신당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잣과 맑은 꿀을 구해서 보내라는 말 같았다. 그래서 정신당은 이것을 어떻게 거절하느냐고 생각해보았다. 성희안이 비록 자기의 친구이기는 해도 한 나라의 영의정이라 정면으로 거절하기도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정신당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사로운 정을 끊고 공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써서 성희안에게 보냈다. 

“잣은 높은 삼 고개 마루 위에 있고 꿀은 백성들 집 꿀벌 통에 있으니 한낱 사또 된 내가 어찌 그것들을 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유연하지 못하고 늘 경직해 있었다. 

큰 일들을 해오면서 오랫동안 관료주의, 엘리트 의식에 젖어 그렇게 소생도 하고 세상을 알만도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태도가 굳어졌던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기에 고향 선배, 윗분, 친지들을 자주 봉접(奉接)하지 못하고 소원한 것을. 특히 고분고분한 예의가 결여되었던 것을 깊이 반성한다. 

이 점은 내가 공직을 떠난 후 고쳐나가야 할 보다 성숙되고 인간적인 과제라고 행각하여 나름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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