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를 찾아서 (93회)
  제12장 내 인생의 오늘과 내일

독서에 있어서 처음에는 철학서적을 읽었으나 너무 난해하고 생경해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소설류부터 읽었다. 그 읽은 책 중에서 특히 나에게 크게 감명을 준 몇 권의 서적을 들어본다. 

<태백산맥>을 통해 해방전후 소작농을 중심한 민중에의 사회주의 침투 실상을 흥미 있게 이해했다. <남로당>을 통해 정책적 시각에서의 사회주의 침투와 대응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노자>, <장자>를 통해 무위화(無爲化) 자연사상에 접근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책들은 내가 야인으로 묻혀 사는 지금의 처지에 지극히 위안이 되었다. 그밖에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통해 동양의 유가(儒家)사상을 <한비자>를 통해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을, <역사> 등이 또한 가난한 내 정신을 가멸고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앞에서 나는 성경을 완독한 얘기를 했다. 성경은 여전히 나의 애독서에서 뺄 수 없다. 

내 뿌리를 찾아서 

우리는 일본의 가고시마현[鹿児島県]에는 임란 때 잡혀갔던 경상도 도공(陶工) 심당길(沈當吉) 씨의 14대 후손들이 아직도 도자기를 구우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그 후손 중 심수관(沈壽官) 씨는 이미 전후 10여 차례나 내한하여 청송(靑松)으로 가 그들이 심당길 씨의 14대손임을 청송 심씨 족보로 확인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제사를 지낼 때도 선조 이래로 구전되어 오는 한국어의 제문을 낭독한단다. 물론 이 제문은 대(代)가 바뀜에 따라 와전되어 지금은 우리말도 일어도 아닌 이해 곤란한 것으로 되었지만, 그냥 그대로 제주(祭主)가 낭송을 한다는 것이다. 이역만리(異域萬里) 구주남단(九州南端)에서 이같이 형통과 자기 것을 지키고, 뿌리를 잃지 않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미국의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란 소설도 결국은 주인공의 선조가 미국으로 팔려가기 전의 고향 아프리카로 건너가 원조를 찾아내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생각해보라. 오늘이 내가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를 낳으신 부모가 있기 때문에 내가 출생했다. 나의 부모도 그의 부모가 있었고, 그의 부모도 부모가 있었고, 그 부모 역시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기에 니체도 말했다. 

“오늘이 인물이 있기까지는 그의 선조들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나의 뿌리를 찾아보는 것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중요과제가 된다. 이 사상은 우리 한국인이 다른 나라에 비해 도 돈덕해서, 일찍이 족보를 만들어 보관하고, 아무리 못살아도, 조상 섬기는 사상이 빼어났다. 

흔히 인품을 평가할 때, 행도(行道), 봉제사(奉祭祀), 접빈(接賓), 진퇴(進退) 네 가지를 그 척도로 삼는 경우가 있다. 행도는 도를 얼마만큼 행하느냐 이며, 봉제사는 4대 봉제사를 뜻하고, 접빈은 손님 접대를 뜻하고, 진퇴는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설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봉제사가 ‘뿌리’를 잊지 말고 받들어가자는 효친사상이다. 

나는 이 숭고한 우리네 숭조사상을 바탕으로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엄숙한 의미를 되새기고 차츰 서구화되어가는 숙맥같은 후예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일련의 뿌리찾기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우선 경남 산청군 진태(進台)에 있는 송은(宋隱) 선생을 배향(配享)해온 신계서원(新溪書院)을 보수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보관된 제기(祭器) 18점을 지방문화제 제135호로 지정받도록 주선했다. 
 
▲ 졸당공(拙堂公) 유덕비(遺德碑)와 실묘(失墓) 되었던 선영을 복원했다

한편 졸당공(拙堂公) 유덕비(遺德碑)와 낡은 재실을 재건하는데도 힘을 보탰다. 자손 된 도리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근 400년간 실묘(失墓)되었던 진사 할아버지의 선영을 족보 등으로 찾아내어 고증을 하고는 복원, 비각을 세웠다. 

한편 주정학(朱程學)이 이 땅에 들어온 후로 약 700년간의 내 직계 선조들의 선영을 창녕, 합천, 의령, 산청, 밀양 등지로 샅샅이 배알성묘(拜謁省墓)했다. 밀성(密城) 박씨 족보편찬위원장이 되어 6권 1질의 대동보 4,0000여 질을 제작 배포했다. 

파도 높은 국내외 정세

파란 많고 다사다난했던 20세기도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21세기의 태양이 뜬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창밖으로 도도하게 밀려온 21세기의 밀물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20세기의 악몽과 비극을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바탕 위에 우리는 보다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국제정세는 어떠한가? 우리의 경제현실은 어떠하며,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통일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 나를 포함한 우리는 이 세 가지 진단을 바탕으로 나아갈 우리들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 

우리 역사를 보면 세계의 움직임과 우리 상황을 넓게 보는 시각이 없어서 931회나 외침(外侵)을 당하는 큰 오류를 범해왔다. 

잠시 19세기 말의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를 짚어보기로 한다. 

일본은 300년의 막부정치(幕府政治)를 종식하고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일으켜 일본을 만방에 개방했다. 외국의 문물을 폭넓게 받아들여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스스로도 나라 밖으로 뻗어나가는 조선을 치고, 나아가서는 만주를 포함한 소위대동아공영권을 구상했다. 

이 개방정책으로 일본은 그 뒤에도 일취월장으로 국위가 사뭇 드높아졌다. 여기 힘입어 세계를 제패하려는 이른바 대동아전쟁까지 일으켰다. 그 싸움에 졌지만 오늘날 세계적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 일련의 역사를 볼 때, 일본의 오늘의 경제대국을 이룩한 데는 바로 19세기 말의 개방정책에 말미암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우리 한국은 그 당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철저하게 시행되던 때이다. 주권이 왕실에 있음은 물론이요, 열강이 다투어 내한하여 개항(開港)과 무역을 제의해왔는데도 우리 조정은 이들을 양이(洋夷)라 하여 철저히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국내의 여론도 통일이 되지 않고, 수구파와 개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민심마저 요동하여 동학농민전쟁까지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10년 뒤엔 노일전쟁까지 일어나 일본은 두 싸움에 승리하면서 마침내 동양의 맹주가 되었다. 그러고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내정을 간섭했으며, 드디어 한일합방의 치욕적인 망국을 가져오게 했다. 

36년간의 잔혹한 일제통치도 서러운데 종전이 된 뒤에도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6.25까지 일어났으니 그 비운은 실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다. 

우리가 이 오늘의 비극을 겪게 된 먼 원인이 19세기 말의 쇄국정책에 있다고도 할수 있다. 그러므로 국내외 정세의 정확한 판단은 그 나라 다음 역사의 기틀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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