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겪은 삼가 드무실_1 (11회)
  제2장 뼈를 깎는 배움의 뒤안길

조광석 선생님과는 긴 인연을 이어갔다. 여러 해가 흐른 뒷 이야기지만, 내가 청와대에서 부실기업 정리 총괄반장의 일을 할 때였다. 어느 날 뜻밖에도 조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가까워서 거기가 어딥니까, 하고 물으니 서울이라고 하셨다. 

너무 반가워서 만사를 제피(除避)하고 팔랑개비처럼 달려갔다. 정겨운 은사의 목소리는 내게 한 자락의 가벼운 흥분마저 가져오게 했다. 기다리는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께 90도로 꾸벅 절을 했다. 접어두었던 옛 사제지간의 정의(情誼)가 일시에 폭발하여 콧등이 시큰해졌다. 선생님께선 어줍잖은 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약간 상기된 어조로 빵을 구해 서울로 왔다고 하셨다. 

내가 그때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었기에, 나를 찾아오신 것이 분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선생님께 은혜를 갚을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열과 성을 다하여 선생님의 직장을 백방으로 구해보았다. 그러나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라지만, 목에 힘을 빼고 한 소박한 야인의 처지로 돌아가 가는 곳마다 허리를 꺾었다. 

그러던 중 부산 조선공사 남궁련 사장의 응낙을 받았다. 옛 은사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내 작은 정성이 그 분을 감동케 했다고 칭찬까지 들었다. 이리하여 선생님은 그 회사의 근로자 훈련원의 교학과장으로 취직이 되셨다. 그러나 1년 남짓 다니시다가 회사 동료들의 거센 반발을 받아 그만두셨다. 다시 상경하여 나를 찾아오셨다. 

나는 다시 그 회사의 중역 한분을 만나 복직을 애원했다. 그 길만이 은사님을 돕는, 내가 이었던 은혜의 한 조각을 갚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평생을 두고 이렇게 코가 땅에 닿도록 남에게 머리를 숙여 간절히 청탁을 한 일은 다시 없었다. 

아무튼 내 정성이 주효하였던지, 조 선생님은 한 직급 올려 다시 그 회사에 복직이 되셨다. 나는 앓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옛말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들먹일 것도 없이, 제자가 옛 스승을 위하고 공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요, 벗지 못할 숙연(宿緣)이 아닌가! 더욱이 조 선생님은 그 옛날 내게 용기를 주고, 향학에의 자양분을 듬뿍 쏟아준 은사가 아니신가! 

그러나 조 선생님은 복직이 된 후로 2년여에 다시 그곳을 떠나셨는데, 소식 듣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어느 하늘 아래이든 선생님이 옥돌보다 귀한 건강과, 맑은 행복누리기를 두 손 모아 빌 따름이다.     
 
▲ 삼가초등학교 동창회 기념촬영 (1987.)

우리가 이사를 온지 근 반년이 지난 9월 1일이었다. 나는 한 밤중에 어른들의 고함소리를 듣고 소스라쳐 일어났다. 눈을 비비고 마루에 나서니, 면 소재지인 삼가(三嘉)의 하늘은 화염이 충천했다. 간간히 귀를 쫓는 총성이 들리고, 불꽃은 용의 혓동아리처럼 밤하늘에 높게 높게 날름거리고 있었다. 어른들은 빨치산이 습격해온 것임에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나는 이 광경을 보자, 칠야(漆夜)의 대화(大火)와 빨치산이란 말에 간이 콩알만 해져서 와들와들 떨었다. 공포와 불안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으나 콩 볶는 듯한 총성이 하늘을 짓찧었다. 그 총성은 꽤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이 바람에 온 동네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찌들어 거의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자 호기심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나는 집을 나섰다. 간밤의 참사가 어딘지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해 보고픈 생각에서였다. 어른들 몰래 집을 나서 읍내 입구에 있는 미륵당(彌勒堂)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손들어! 암호!”
국군 몇 사람이 총을 겨누며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임마, 암호 못 대는 걸 보니 빨치산이 시켜서 심부름 가는구나. 맞지?”

“아,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는 드무실 사는데예, 불탄 곳이 어딘가 하고 구경하러 갑니다. 아저씨, 어디가 탔습니까? 왜 어젯밤에 그렇게 큰 불을 내었습니까?”

“아, 이 맹랑한 놈 봤나. 우리가 불을 낸 게 아니라 지리산 빨치산 놈들이 내려와 면사무소와 지서에다 불을 질렀단 말야. 우리 진주에서 온 국군이란 말야, 임마. 너 그 빨치산들 심부름 가지?”

“아닙니다. 뭐라캅니까. 난 어디가 탔나 하고 궁금해서 가는기라예.”

국군아저씨가 하도 다그치는 바람에 그만 저절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거짓말이나 변명을 둘러대도 될 것 같았으나, 솔직하게 대답했다. 

“허허. 이놈 좀 봐라. 악지가 무던하게 센 놈이구나. 그럼 얼른 돌아보고 와야 한다, 알겠느냐?”

이리하여 나는 용케 삼엄한 보초선을 통과했다. 그러고는 읍내로 접어들었다. 기양루(岐陽樓) 맞은 편 병원 가장자리를 지나니, 국군의 부상병들이 섬쩍지근한 신음소리를 내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걸 보자 간밤의 전투가 상상한대로 치열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질서를 잃고 걷잡을 수 없이 술렁거렸다. 

그곳을 지나 지서와 면사무소 쪽으로 가니 아까 국군이 말 한대로 고색이 창연했다. 건물이 폭삭 내려앉아 아직 군데군데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간밤에 바라본 그 화염이 바로 이 지사와 면사무소의 건물이 타던 화염이었음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 회신(灰燼)을 보자, 어린가슴에도 한량없는 비애가 느껴졌다. 그렇다! 지서는 그만두더라도 옛날 봉성관이나 쌍명헌이라 불렀던 건물인 면사무소는 몇백 년 내려오던 객사가 아니던가. 그 집의 규모가 웅장함은 물론이려니와 지방문화재로서 얼마 남지 않은 것 중의 하나라는 것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했다. 옛날 동헌과 객사로 쓰던 건물이 하룻밤에 다 없어지고, 귀중한 봉성관을 이때 소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건물이 보존되었다면 역사나 문화적 가치가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면 실로 땅을 치고 통곡을 해야 할 일이다. 1955년 그 자리에다 45평짜리 청사를 지었지만, 낡아서 1989년 11월 말경 다시 콘크리트 2층 건물 건평 171평으로 준공하였다. 

아, 슬프다! 그리고 안타깝다! 제 아무리 현대식 2층 건물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한들, 우리 옛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그 봉성관을 이길 수 있으랴! 영욕이 헛것이고 인생사가 도무지 덧없다고 하지만, 이 고을의 옛 일이 스민 대하(大廈) 고루(古壘)가 동족상쟁으로 한 주적 잿더미로 변했다니!

그 날 종일을 굶고 우울한 마음으로 장터 언저리를 맴돌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서는 때 아닌 난리가 났었다. 내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종일토록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간밤의 일대 변란 끝이라 어른들의 걱정이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의 무단가출을 오늘날까지 비밀로 간직하고 있다. 물론 박구리 새처럼 본대로 느낀 대로를 많은 언어로 구성지게 보고할 수도 있었다. 나는 흉사에 무슨 구경났다고 거들먹거리고 다녔느냐고 불호령이 내릴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종내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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