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시장의 획기적 전기 마련 (48회)
  제7장 재무부에 바친 청춘의 열풍

나는2년여의 청와대의 외자관리비서실 파견근무를 마치고, 1971년 6월 15일 다시 재무부로 돌아왔다 내 나이 33세가 되던 해다. 

1971년은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4월 27일은 3선 개헌에 의해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5월 25일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8월 12일에는 대한적십자사가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으며, 12월 9일에는 월남파병 청룡부대 제1진이 귀환한 해다. 

청와대에서 돌아온 나는 서기관인 법무관으로 발령이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억울하게도 서열이 낮아 우선 법무관 직무대리의 발령을 받았다. 나는 부실기업 정비작업에 몰려, 해외연수나 국내연수 교육에서 나오는 승진에 필요한 가산점을 얻지 못해, 서열에서 본의 아닌 불이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실은 해외연수나 국내연수 기회가 있었는데도 일 때문에 못 받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에 공무원 교육원에서 한 달동안 교육을 받았다. 이때 수석으로 수료하게 되어 가산점을 취득하였다 그 가산점에 의해 ‘직무대리’란 호칭을 빼고, 명실공이 법무관 발령을 받게 되었다. 

나는 이때 고독감과 환멸과 비애에 사로잡혀 있었다. 천하를 좌우하던 통치부에서, 그것도 우리 경제의 광범한 분야에 걸친 문제점과 대책을 구상하고 시행하는 위치에서 1개 부처의 극히 작은 부분의 실무자로 전환된 데다가, 갑작스런 힘의 공동화(空洞化) 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만 아니라, 부실기업 대상과 연루된 각종 루머와 중상모략 등이 더러 있어, 나날이 우울했다. 

세상 일이란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강한 힘을 가졌던 자가 하루 아침에 짜부러지는 영욕의 엇갈림을 실감했다. 그 힘이 만용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 우리 경제를 위한 것이었는데도, 2년이 넘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심초사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누구 하나 알아주거나 변명해주지 않는 것 같지 않았다. 

이 나라 경제의 튼튼발전 기반을 마련한다는 일념으로,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쓰고 있는 흐린 안경을 벗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청춘을 불살랐는가? 피와 땀은 과연 이렇게 정을 맞아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회의와 실의의 늪에서 용감히 떨치고 일어섰다. 집도의(執刀醫)는 가족들의 잡음에 배달려서는 병자를 속 시원히 치료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터득했다. 

해는 바뀌어 1972년이 되었다. 이 1972년이야말로 국내외적으로 기억할만한 해였다 2월 21일에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고, 4월 11일에는 근면, 자조, 협동을 표방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다. 7월 4일에는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되어,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 남덕우 장관으로 부터 기획관리실 법무담당관 임명장을 받고 있다

8월 30일, 9월 13일, 11월 2일, 12월 1일 등 4차에 걸쳐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남북조절위원회>가 열렸고, 7월 17일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어 국회가 해산하고, 헌법효력 일부가 정지되었다. 12월 15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었고, 12월 23일에는 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으로 박정희 단일후보를 선출했다. 12월 27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고, 소위 <유신헌법>이 선포되는 등 제4공화국이 수립되던 해이다. 

그때 나는 법무관이었는데, 원래 이 법무관 자리는 명분은 어떻든 사실상으로는 승진 후 누구나 1년쯤 거치게 되는, 중간 정류소와 같은 직책이었다.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국회가 해산되고 유신헌법이 공포되면서 과도적으로 소위 유신국무회의가 잠정적으로 국회의 기능은 하게 되어서 법무관 자리가 바빠진 것이었다. 소위 유신체제를 뒷받침할 각종 개혁 입법이, 유신국무회의를 통과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팔자로 일복을 타고 났나보군.”

한편 이 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기록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소위 저 유명한 <8.3사채동결조치>가 그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우리나라 경제건설은 거의 맨주먹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요한 외자와 기술은 외국에서 빌려왔고, 내자는 금융기관에서 빌렸다. 자기 자본을 평균해서 20%도 채 안 되는 지극이 영세한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업들은 전반적으로 자금난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운영자금을 일시 사채에 의존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 자금시설까지도 고리 사채에 의존하는 기업이 허다했다. 정부의 경제개발시책에 호응하여 막상 건설은 시작했는데, 금융기관 융자에도 한계가 있고 하니, 급하면 공사중단 보다는 비싼 사채라도 우선 글어다가 건설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과정에서 부실기업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부실기업 정리가 끝난 뒤에도 정부는 주요 업종별로 재정, 금융, 세제상 지원책을 적극 강구해왔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업들은 그동안 빌려 쓴 차관액에 대한 거치기간이 끝나, 그 원리금 상환액이 집중적으로 도래하는데다가, 막대한 고리사채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상황은 너무나 심각해서 무언가 손을 쓰지 않으면 우리 경제에 심각한 위기가 올 것이라는 것이 뜻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식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 대통령은 헌법상의 대통령의 비상긴급조치권에 의거, 소위 <8.3조치>를 단행하게 된 것이었다. 이 조치에 따라 채무자인 기업은 사채를 신고토록하고, 신고 된 사채는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상환하되, 그 이자율은 공금리 수준 월 1.35%로 했다.  

당시 신문보도 증에 의하면 기업에 따라서는 사채업자와의 지금까지의 관계나 앞으로의 관계를 고려하여, 신고에서 일부 누락한 부분도 있었다고 하고, 선의의 영세 사채업자만 희생되었다는 여론도 있긴 했다. 이 조치로 기업은 사채압력으로부터 크게 해방되어, 한숨을 돌리게 된 것 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조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헌법과 민ㆍ상법을 포함한 모든 법령체계가 국민의 재산권 보호ㆍ채권자 보호라는 측면에서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되레 채무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예외조치였다. 그만큼 이 조치는 기업의 성장과 경제발전이 우리의 지상과제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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