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비서실 사정담당 비서관 (62회)
  제8장 정치의 회오리 속에서

청와대나 대통령이란 권부의 위엄을 등에 업고 남들이 말하는 ‘호가호위’의 재주를 부리지 않기도 단단히 나 자신을 타일렀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 아니라 800리라 해도 나는 나대로 그늘을 만들 작정이었다. 

여기서 나는 그 당시의 일들에 대한 정치적, 인간적 고뇌에 관련된 민감한 부분은 후일의 역사적 평가에 맡겨두고, 일체 용훼(容喙)하지 않기로 하겠다. 국가의 기밀에 관한 것도 덮어두기로 하겠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우선적 과제는 수술 시간이 넘은 이른바 ‘25시’의 열악한 상태에 있는 고질(痼疾)은, 눈물을 머금고 집도를 해 기사회생의 길을 모색해나가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부임 1개월 만의 어느 날이었다. 나더러 11대 총선거에 출마해보지 않겠느냐는 종용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선의의 권유를 단호히 배격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였다. 

하나는 고등고시란 힘겨운 등용문을 통과한 전문 직업관료로서 이 비장의 무기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서였다. 

다른 하나는 내 나이 아직 불혹을 넘긴 40대 초인데, 높은 경륜이 필요한 정치에의 입문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에게 부과된 업무에만 전력투구하기로 했다. 사정1부장으로서 사정 업무의 종합기획과 경제분야를 포함한 공직사회의 사정업무, 사정협의회의 운영과 사회정화위원회의 운영 등 대단히 광범하고 막중한 업무를 부여받았다. 

사정업무 추진방향 

나는 우선 사정업무의 추진방향을 설정했다. 무릇 나침반 없이 항해를 꾀하는 선장은 가장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장이기 때문이다. 그때 내세운 추진방향은 간단했다. 구시대의 유물을 청산하고 새 시대 새 역사 창조를 위한 정의사회구현이었다. 

사실 흘러간 낡은 시대는 새롭게 오는 시대에 의해 비판되고 반성되고, 대체되어지는 것, 이것들은 결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수천 년 역사를 통하여 반복되는 작업이 아니던가. 묵은 것이 가면 새것이 오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 만고의 철리(哲理)가 아니던가.

조선조는 양반이 득세하여 시대근성과 관존민비의 특권의식과 허례허식에 찌들었던 낡은 시대였다. 진이 나도록 시달림을 받은 일제통치시대는 식민지시대라, 패배주의나 왜곡된 저항의식이 팽배하여 요령과 기회주의만이 능사가 되어 었었다. 해방 이후의 혼란기엔 외래사조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방종과 무질서를 다반사처럼 여기고, 지나친 이기주의와 퇴폐풍조가 장마 뒤의 독버섯처럼 만연했다. 

1960, 70년대의 물량 위주의 고도경제성장과 그에 수반되는 일부 부정, 부패, 부조리가 어두운 뒷골목 그늘 속에서 만연되어갔던 그러한 시기였다. 권력형 부패와 황금만능 사조, 불신풍조가 소나기처럼 몰고 오는 구름떼처럼 발호(跋扈)했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잔재의 치유 없이는 지속적 국가발정은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 사정담당관 비서관 시절 / 맨 왼쪽이 필자, 두 사람 건너 허삼수 사정수석

사정업무추진방법

이렇게 추진방향이 결정되자 그 목표에로 치닫는 방법이 모색되었다. 지금까지의 서정쇄신의 방법처럼, 수사차원에서 개별사건을 처리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방법은 통치부가 할 일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사회전반의 부조리나 병폐를 과학적으로 진단하고, 이에 대한 원천적인 사정방향을 제시하기로 했다. 

그에 따라 정부 가 부처기관은 구체적인 시행계획을 마련해서 집행에 들어가고, 사회정화위원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 확산시켜 나가는 한편, 정화운동 차원에서 지원노력을 하여 그것이 정착되도록 하기로 했다. 

사정협의회 구성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 우선 사정협의회를 구성했다. 각 부처의 차관급을 중심으로 정보, 사정기관의 관련 인사로 구성되었다. 이 협의회에 상정, 토론 끝에 확정된 안은 각 부처의 감사관에 시달하고, 각 감사관은 각 부처의 전국 산하 기관에 이를 시달했다. 

사회정화위원회는 이를 전 국민에게 홍보했다. 이 협의회에서 연도별로 추진할 중점활동사항을 수립해서 발표했다.         

청렴도 진단체제 구축과 공작풍토 정화, 사회비리 폐습제거, 제도환경 개선, 사회정화운동을 통한 의식개혁 등을 중심과제로 하여 1981년엔 국가사정활동기반을 구축하는 해로 정하고, 1982년엔 국가사정활동의 저변을 확산시키며, 1983년엔 국가사정활동을 성숙시켜나가고, 1984년엔 국가사정체계를 확립하여 1985년부터는 모든 사정활동의 자율추진체계를 정착시켜 나가기로 했다. 

이 기간 동안에 나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많은 일을 했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힘들었거나 인상에 남는 몇 가지를 간추려본다. 

공명선거풍토 개선

두말할 것도 없이 민주사회의 선거제도는 주권재민 사상의 구체적 실현수단이다. 그러나 과거의 선거양태를 분석해본 결과 대체로 과열선거, 관권선거, 금권 타락선거로 분석진단 할 수 있었다. 5.30의 제2대 의원선거 때는 정치과열로 무려 41개의 정당이 난립하여 사회혼란을 자초했다. 그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은 결국 6.25전쟁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자유당의 3.15선거는 관권남용의 부정선고로 규정될 수 있다. 이로 인한 국민저항은 마산사태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마침내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는 지점에 이르렀다. 한편 10대 의원선거는 금권남용의 선거였다. 얼마를 쓰면 당선되고, 얼마를 쓰면 떨어진다는 마치 슬로건 비슷한 해괴망칙한 말이 국민 사이에 공공연하게 퍼졌다. 

일이 여기에 미치자 금권만능사상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도처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마침내 부마사태가 일어나고, 직접적인 사유라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10.26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비극이 초래되었다. 이처럼 한결같이 선거부정은 정권의 정당성을 악화시키고, 국기(國基)의 붕괴 위험성마저 초래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우리 국민은 웬만한 이유로는 학생데모에 가담하지 않지만, 부정선거 규탄에는 학생들과 행동을 같이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정위원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선거부정만은 단호히 막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도출하여, 부정방지를 위한 기본방침을 수립했다. 질서와 평온 속에 철저한 공명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째, 공명선거 실시를 위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재천명하고
둘째, 계몽과 홍보 강화로 사전예방에 중점을 두며
셋째, 선거일 공고 전에 사전선고운동 사례를 입건 단속해서 공명선거 분위기를 조성하고
넷째, 법정선거 기간과 선거종료 후를 불문하고, 소속 정당 인물에 관계없이 선거사범은 엄중 의법처리하기로 한다.    

그 결과 11대 총선은 괄목할 만한 공명선거가 치러졌고, 선거 후유증도 거의 없었다.

 
  입법회의 경제1전문위원을 지내고 (61회)
  11대 총선의 교훈 (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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