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벨탑’은 아직도 건재하다. 아직 그 탑의 벽돌을 내던지고, 중도에서 폐할 수는 없다. 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해서 우선은 몸을 움추리듯이, 나도 새 출발을 위해 만반의 준비태세가 필요하다. 그렇다! ‘수신제가(修身齊家)’는 준비태세를 확정 짓는 가장 위대한 최대공약수이다.
나는 내 인생 3∙4분기를 넘어서고, 이제 4∙4분기의 출발점에 섰다. 100m경기는 그 출발이 가장 중요하듯 내 마지막 남은 자투리 4∙4분기의 첫출발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 인생에는 휴일이 없다. 아니, 휴일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언제나 할 일이 많아 동으로 뛰고 서로 뛰어 하루가 문틈에서 본 수레처럼 너무도 빠르게 달아난다. 아무리 휴식의 시간을 가지려 해도 나는 해야 할 일거리들로 풍년을 이룬다. 끝도 한도 없는 일들이 꼬리를 물고 나를 찾아온다. 어쩌다가 그 행렬이 끊어지면 내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어 그 단절 부분의 땜질을 하게 된다.
구르는 돌은 결코 이끼가 끼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공직자의 제목을 벗은 후 낙향하는 선비의 마음으로 인생의 새로운 바다를 헤엄쳐 나갈 준비를 하였다. 또 모 재벌그룹과 회계법인 등에서도 고문의 자리를 제안했지만 내 청빈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과거의 영향력을 가지고 로비하는 인생은 살고 싶지는 않았다.
정권의 실세였던 모 장관은 증권감독원장 겸 증권관리위원장을 하라는 제안도 했다. 그동안 치적에 대한 예우와 능력을 사서 장관급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증권감독원장은 내가 재무부 증권과장일 때 만든 자리라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실명제가 되면 증권시장은 망하게 되어 있었다. 더욱이 나는 창의력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일을 하고 싶지, 산하기관에서 정해진 범위의 일을 처리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자리를 나를 위해 3개월을 비워두었다고 했지만 내 인생 철학에 맞지 않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은 안 하는 게 좋은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도 거절했다.
석탄공사를 비롯해서 국영기업체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는데, 반응이 좋았다. 강연을 하다 보니 정말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전으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 공부를 했지만 이제는 참다운 인생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해왔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해답을 구하고 싶었다.
<국보위>의 재무분과위원으로, 청와대의 사정비서관으로 이 나라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면서 박판제 이름 석 자가 무던히 유명세를 떨쳤는데, 당분간은 이 이름이 잊혀지기를 바랐다.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은 잘못하면 허명(虛名)이 되기 십상이다. 이제는 내 안으로 들어가 참다운 나를 찾고 더욱 충실히 가꾸고 싶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마다 그래왔듯이 이 시기에도 자아 성찰을 위한 작업은 공부였다. 3년의 세월동안 연수원에 들어갔다 여기고 집안에 틀어박혀서, 매일아침 8시면 아침식사를 한 후 정장을 하고 서재에 들어가 독서를 했다.
6개월간 한글과 영어성격 132권 완독
그때 딸 둘이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다. 딸들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알았지만 성경을 번역한다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젊은 아이들이 영어만 잘한다고 성경번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하고 싶어서 지인인 목사님에게 제대로 하는지 물었더니 목사님 왈 “몇천만 원씩 들여서 전문가라는 분들한테 번역을 맡겨보았는데 별로 다른 게 없더라.”면서 우리 아이들이 한 번역이 “지금 세대와 오히려 소통이 되는 번역이다.”라고 극찬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솔깃해진 나는 500여 페이지의 성경번역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예전에는 구약의 창세기가 너무 지루했는데, 다시 마음을 잡고 읽어보니 읽을수록 새록새록 빠져들었다. 번역본 성경을 3개월에 걸쳐 독파한 나는 딸들이 번역한 영어 성경원본을 읽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정도의 영어실력이면 충분히 독해가 가능해서 어렵지 않게 도전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성경을 읽던 그때의 나의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성경 한 구절바다 내 안광이 통과하지 않은 게 없게 하자는 각오로 성경의 모든 단어와 숫자를 새겨가며 읽는데 장장 6개월이 걸렸다. 한글과 영어 성경 읽기를 끝내고 나는 기도했다.
“이 나이에 한글과 영어 성경을 모두 읽었으니 주님께서 축복을 주십시오.”
그 기도 끝에 나는 하느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너를 사랑했으나 나를 배신하고 마음대로 살다가 이제야 돌아왔구나.”
그 많은 책을 읽고도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성경을 읽고 나니 믿음으로 남은 의혹을 없앨 수 있었다. 그래, 이 모든 것은 신이 하신 일로 신의 영역이니 믿어버리자고 생각하니 모든 의문이 해소되면서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전에는 정토에 앞장서자고 하는 불교에 가까웠는데, 그 이후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내자도 기꺼이 내 뜻을 따라주었다.
그 시절 내가 읽은 책이 350여권은 되는 것 같다. 한글과 영어 성경 완독을 권으로 치면 132권이지만 50권으로 계산했다. 바이블은 신자가 아니더라도 평생에 한번은 읽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영민한 딸들에게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번역 당시 두 딸 박동은과 박은선은 아직 연소하여 실제 번역 작업을 했으나 영어 대조한 이로 되어 있고, 감수하신 목사님 아홉 분의 이름이 역자로 되어 있는 그 성경은 지금도 베스트셀러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무용이 유용이 되는 세상
5공청산과 민주화로 가는 역사의 길목에서 초연하게 이를 지켜보던 나에게 친지와 고향인들은 짙은 우려를 나타냈다. 해외라도 다녀오며 조용히 쉬라는 권유를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고마운 권유를 단호히 물리쳤다. 비록 관직이 없다 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백의종군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9년 1월 10일이었다. 뜻밖에도 <민정당국책자문위원>으로 위촉이 되었다. 그 발령을 받자 문득 <장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무용(無用)이 유용(有用)’이란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다.
옛날 ‘석’이라는 목수가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제(齊)나라로 가다가 큰 상수리나무 밑을 지나게 되었다. 그 상수리나무 밑에는 사람은 물론 마소까지 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석이의 제자들이 우리도 좀 그 그늘 밑에서 쉬어가자고 했다. 그러자 석은 벌컥 화를 내면서 제자들을 꾸짖었다.
“예끼놈들, 상수리나무가 어디 나무라고 하겠느냐? 아무리 크고 그늘이 짙다 해도 그런 데데한 나무 밑에서 쉬어가? 잔만 말고 이곳을 떠나자.”
이리하여 일행은 하는 수 없이 그 상수리나무 밑에서 쉬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그 날밤 석이의 꿈에 목신(木神)이 나타나 석이를 호되게 꾸짖었다.
“너 이놈, 오늘 낮엔 그 큰상수리나무를 비웃었지? 그러나 이놈, 넌 ‘무용의 유용’을 모르는 멍충이구나. 아, 그 상수리나무가 쓸모없는 나무라 해서 버려두었기에 오늘날까지 베이지 않고 살아 있는 것 아니냐? 만일 그 상수리나무가 쓸모 있는 나무였다면 벌써 네놈과 같은 목수들이 베어 갔을 것이다. 이처럼 어느 무용지물도 어느 모는 유용한 법이다. 에이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그렇다. 무용이 결코 무용일 수만은 없다. 어느 한 모퉁이는 유용하게 쓰이는 법이다.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와 혜안이 있는 자는 어진 자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무용지물로 치부하고 버렸는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용지물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여 나는 집권당에서 불러 준 데 대해 몹시 흔감(欣感)하고 고마웠다. 그 위원회의 간사로서 많은 당면사들을 토의했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위에 보고했다.
한편 그해 10월과 11월에 걸쳐 경기 경남지구의 기업체 초청을 받아 시국강연을 했다. 그 강연에서 어려웠던 과거를 딛고 오늘이 발전을 가져온 그 피나는 우리들의 과정을 역설했다. 과거의 청산문제에만 얽매여 현재의 발전과 역사의 진행을 가로막는 어리석음을 교통순경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대로를 가로막고 교통사고를 취체(取締)하면 잇달아 오는 차들이 정체되어 되레 혼잡을 이루게 한다. 이런 때는 사고차를 길옆으로 제쳐놓고 조사해야 다른 차의 소통이 원활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영구불멸로 이어져야지, 결코 단절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말자는 말과는 다르다. 분명히 잘못이 있으면 처벌할 것은 하고, 반성할 것은 하고, 고쳐나갈 것은 고쳐나가는 것이 옳은 방향일 것이다.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여 현재의 발전과 미래에로의 역사의 진행을 가로막고, 나아가 지금까지 힘써 이루어놓은 것을 무너뜨릴 우려가 있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었다. 강연 도중에 내가 좋아하는 헤겔의 말도 잊지 않고 인용했다.
각 상태는 비록 소멸될 갖고 있더라도 각기 필연적 발전단계이므로 모두 고유하고 신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존재하는 것이 모두 정당하다는 것은 잔인하리만큼 정당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