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회의 경제1전문위원을 지내고 (61회)
  제8장 정치의 회오리 속에서

한편 대기업도 정부의 산업정책의 방향에 따라 정상적으로 육성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균형발전을 저해하는 경제적 비효율과 비리를 제거토록 함으로써 이 땅에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깊이 뿌리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기업인들은 어떠한 현실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신념으로 극복하고 생산활동을 활발히 해서 기업을 튼튼히 키워나가는 것이 바로 애국하는 길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오직 복지국가 건설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기업체질강화대책>을 각 분과위원장 회의에 보고해서 협의를 끝낸 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께서는 관계부처 장관과 협의해오라고 분부했다. 나는 재무부장관과 상공부장관, 경제기획원 장관과 국무총리에게 그 내용을 보고해 동의를 얻은 후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주요 유관기관과 시행에 필요한 협의를 끝낸 후,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문공부 회의실에서 사전설명회를 가졌다. 

이튿날부터 이 대책은 도하 각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에 대서특필되었다. 각종 사설, 해설, 좌담회 등을 통해서도 상세히 보도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한 달 이상 계속되었고, 심지어 이 대책은 결코 단기간의 한시적 대책이 되어서는 안 되고, 80년대의 경제철학이 되어야 한다는 고무적인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 조치가 발표 된 뒤의 시행에 관한 책임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실이 지기로 되어 있었다. 대체로 아무리 정당한 대책이라 해도 정책을 만든 사람과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이 다를 경우에는, 특히 그것이 혁신성이 강할 경우에는 시행과정의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바로 이 대책 수행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러간 지금도 우리는 계속 이 문제로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가슴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 금할 길이 없다. 
 
▲ 동아일보의 '기업체질강화대책' 내용기사 (1980. 9.27.)

1980년 10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해체되었다. 나는 이제 친정인 재무부로 되돌아가는 줄로 믿고 있었다. 누가 생각해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는 나는 11월 5일자로 뜻밖에도 <국가보위입법회의(이후 ‘입법회의’)> <경제1전문위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것은 그동안 ‘국보위’가 발표한 각종의 경제개혁 조치들에 대해 법적인 뒷받침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그동안 그 일에 직접 관여했던 사람이 직접 입법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데서 나온 산술적인 발상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도리 없이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전문위원으로서, 회사의 법정관리의 악용을 방지하기 위한 <회사정리법> 개정과, 주식회사 외부감사제의 도입을 위한 <상법상특례법> 제정과 각종 세법의 개정 등 경제관련 개혁입법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주식회사 외부감사제에 관한 법률의 제정과 관련해서는 일부 정부부처와 경제단체 등으로부터 상당한 반발의 화살을 받았으나, 그럴 때마다 개별접촉 등으로 설득과 이해의 바탕 위에서 일을 추진해나갔다. 이 법은 본회의를 통과했고,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제를 이 나라에 최초로 도입한 획기적, 역사적인 일이 되었다. 그 일로 우리나라도 경제발전에 걸맞은, 자본주의적 제도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개혁입법 이외에도 연말 정기국회가 해야 하는 다음 연도의 새 예산안과 각종 부수법안과 각종 동의안 등을 심사보고 하는 작업도 해야 했다. 극히 제한된 시간에 이 같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마침내 1980년 한해가 가고 1981년의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해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대통령이 새로 선출되고, 제5공화국이 출발했으며 ‘국보위’와 ‘입법회의’의 임무도 종결되었다. 

이때를 계기로 친정인 재무부로 돌아가고 싶었다. 잔뼈가 굵은 친정이요, 그곳에 가야 내가 길들이고 갈고 닦은 공복(公僕)의 도리를 다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이 간절한 소망과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재무부는 서열관계도 있으니 ‘전매청차장’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는 엉뚱한 권유를 받았다. 

나는 거절했다 언젠가는 전매청으로 가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나는 응하지 않았다. 전매청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집행관서보다는 창조적인 정책개발업무가 내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디 자리인 재무부의 국고국장으로 복귀해도 좋으니, 그렇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것이 그때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입법회의’ 최평욱 사무총장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참으로 뜻밖의 발을 하였다. 

“축하합니다. 이번에 청와대 대통령 사정비서관으로 일하게 되었소.”

영전인지 축하를 받아야 할 일인지는 모르나 채 황당함을 느꼈다. 경제관료가 사정업무를 맡게 되다니, 참으로 기상천외하게 느껴졌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삼수갑산을 갈망정 두 번 다시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환부를 집도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풀밭의 이슬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찬란한 ‘바벨탑’을 쌓는다 해도, 그 일만은 도무지 적성에 맞는 것 같지가 않았다. 흑백을 가려서 단두대에 올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원망과 모략과 저주의 화살을 막는 내 방패도 이젠 막 구멍이 뚫어질 정도로 고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평소의 신념대로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그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면, 국가의 명이라면 개인적인 호불호를 따지려 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국보위’와 ‘입법회의’에서 내가 한 제반의 경제개혁조치와 내 정의감 등이 종합평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기꺼이 이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1981년 1월 24일의 일이었다. 나는 ‘입법회의’의 경제1전문위원에 이어 다시 청와대에 남게 되었다. 

사람들은 시쳇말로 대통령이란 지존 옆에 있으니 물살이 세어 광내고 때 빼는 입신양명에 이보다 더 유리한 게 있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고사를 배격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호랑이가 어느 날 여우 한 마리를 잡았다. 그러자 여우는 겁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호랑이에게 큰소리로 떵떵거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호랑아, 호랑아, 나를 잡아먹어서는 안 돼. 난 말야, 하느님이 날더러 백수의 어른이 되라고 하셨거든. 지금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하느님이 명령을 어기게 된단 말야.”
“임마, 그런 게 어딨어? 새빨간 거짓말 하지도 말라고.”
“아냐, 내 말을 못 믿겠거든 어디 한번 이래 보자.”
“어떻게?”
“흥, 내가 네 앞장을 서서 걸어보잔 말야. 그러면 온 짐승이 나를 보고 겁이 나서 모두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거야. 어디한번 그래보지 않겠어?”
“그래 좋아. 그래보자. 네까짓 게 뭔데 겁을 내고 달아나?”

여우는 호랑이의 앞장을 서서 점잖게 걷고, 호랑이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과연 온 짐승이 기절초풍을 하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아둔한 호랑이는 여우 뒤를 따라가는 자기를 보고 짐승들이 겁을 먹고 달아나는 줄을 모르고 여우의 말대로 여우가 겁이 나서 짐승들이 달아나는 줄 알았다. 
 
호랑이의 위엄을 빌린 여우의 간교함이 잘 나타난 이야기다. 나는 결코 이 당시 결코 이런 여우가 되지 말자고 맹세했다.

 
  기업체질강화대책_2 (60회)
  대통령 비서실 사정담당 비서관 (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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