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특별정리반_2 (45회)
  제6장 국록을 먹던 공직의 바벨탑

또 불건전한 대출질서의 시정방안을 시달하고, 고액 대출금 회수대책을 수립했다. 산업은행 출자와 관리기업체에 대한 대책과 외자도입 적격업종 및 인가요건을 마련하여 외자도입 선별기능을 강화하여 필요불가결한 것만 인가하도록 했고, 현금차관에 대한 대책도 수립 시행하여 내자 조달용 현금차관을 일체 불허하고, 물자 차관도 제한하며, 국제금융기구등으로부터 외화자금 조달을 권장했다. 

이외에도 지금보증 업무의 개선방안과 산업은행지주관리 제도의 신설 등 지금까지의 정부의 산업과 금융정책을 재검토하고, 이에 대한 개선방향을 다수 제시했다. 우리는 당초 계획대로 1주일에 1건씩 대책을 마련해 보고했다. 그때마다 대통령 주재아래 비서실장, 부총리, 관계부처 장관, 관계 수석비서관, 관련 주요당직자가 참석하여, 신중하게 숙의를 거듭해 대책을 확정했다. 

우리는 맨 먼저 철강산업에 대한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예나 이제나 철강산업은 기간산업으로, 국민경제상 가장 비중이 큰 삼업이다. 철강업은 기간산업 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산업으로서 기계공업, 건설업, 금속광업 등 타 산업에 연관효과가 크므로 일국의 경제발전의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철강업은 방대한 자본이 소요되고, 생산의 일반적 집중도가 높으며, 제품과 투자효율이 다양하지만 수익이 비교적 박한 산업이다. 당시 철강업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크게 다음 둘로 요약되었다. 

첫째, 수급상의 문제점이었다. 우리나라의 철강재 수요는 1959년도의 13만 톤에서 1968년도에는 1백만 톤으로 증가되었으나, 공급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중간제품인 선철과 제강시설이 최종제품 생산시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여 제선, 제강, 압연 시설간의 ㅈ불균형을 나타냈다. 

그래서 1968년 중 철강재 완제품 27만 톤, 소요원료 63만 톤, 계 90만 톤을 수입함으로써 1억6백만 달러의 외화를 지불했다. 산업발전에 따라 철강수요는 급격히 늘어날 것이고, 수입수요도 계속 늘어날 전만이었다. 

둘째, 원광석 확보문제였다. 국산 원광석은 거의 대부분 수출하고 있어서 국내 수요량 확보가 곤란할뿐더러 가격도 고가였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종합제철공장의 건설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이리하여 국가 기간산업으로서의 철강공업진흥을 위한 종합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조속히 추진하되, 그 규모도 60만 톤 계획을 수정하여 103만 톤으로 확대하고(1973년 7월 준공예정) 재일교포가 건설하도록 허가한 조일제철은 이윤이 많은 압연 부문이므로, 이것을 포항종합제철이 흡수하여 재선→제강→압연의 일련 생산체계를 확립하여, 수지 균형을 기하도록 했다. 인천제철은 인천중공업을 흡수 합병하여 선강 압연 체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규모의 이익을 도모하고 철강공업육성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이 보고를 받고 박 대통령은 포항제철 규모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 포항제철은 1973년 6월 9일 용광로를 준공하며 쇳물을 뽑아냈다. /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포철 회장이 용광로에서 시연을 하고 있다 [출처 ; 포스코]

“저마다 의견이 다른데, 일본 사람들은 한국의 현 경제상황으로는 철강공업이 이르다 하고, 어떤 이는 30만 톤은 지금쯤 시작해야 된다고 하고, 어떤 전문가는 이왕 하려면 최소 경제단위는 60만 톤이 돼야 한다기에 60만 톤으로 한 것인데, 오늘 보고를 받아보니 100만 톤이 돼야 하겠군. 그렇게 합시다.”

다음으로는 원양어업과 관련된 문제인데, 그 당시에는 신흥수산 등 3개사가 연어와 송어잡이를 목적으로 선단을 구성하여 조업 중에 있었다. 그 선단규모가 과소해 적정경제단위가 되지 못하고, 자금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북양어업 조업규모를 서경 175° 이동(以東)의 태평양 공해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나, 본 해역은 공해라 할지라도 미국, 캐나다, 일본 3국 간의 어업규제 구역으로서 연어, 송어, 어업 등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이들 3개 수산회사가 도저히 자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거래은행으로 하여금 공매처분 하도록 하고, 보유 선박은 별도 회사를 설립, 근해 어선단과 원양 어선단으로 구분 편성하고,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원양어선단으로 하여금 북양어업에 출어토록했다. 그 원양어선단의 보고에 의하면, 한번 그물을 던졌다가 건지면 자그마치 10만 불어치가 한꺼번에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접하자 우리는 환호를 울렸다. 왜냐하면 이렇게 된다면 얼마 안가서 차관액을 상환하고도 달러를 노다지로 캘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여기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즉, 연어는 원래 산란기가 되면 북미 알래스카 연안으로 몰려와 산란을 하고는 그 것이 어느 정도 크면 다시 공해로 나간다고 했다. 다시 성어가 되어 산란기가 되면 전에 산란한 그 장소로 꼭꼭 되찾아오니, 그 연어는 국적이 분명 미국이라는 것이었다. 

역지사지하면 그럴법한 논리였다. 그러나 우리 측으로서는 여간 큰 낭패가 아니었다. 외자로 대선단을 조직하여 목하 어로 중이며, 이것을 철수하는 경우 그 선단에 대한 차관원리금 상환이 불가능해지고, 그리되면 은행이 다 뒤집어쓰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우리 측에서는, 연어가 알래스카에서만 산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진해만에서도 산란한다. 더욱이 우리는 공해상에서 조업중에 있음을 강조하고 어로(漁撈)를 계속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미 상원에서는 데오돌 스티븐스 의원이 한국이 연어잡이를 중지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러고는 미국 해안경비정이 현장에 출동하여 우리 어선을 감시하고, 하늘에는 헬리곱터까지 띄워 해공 양면에서 감시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이 다급해지자, 우리는 연어가 아닌 잡어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우리 어선에 직접 승선하여 그 사실을 확인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 정부로서는 이로 인해 한ㆍ미 간에 더 이상의 전통적 우의에 금이 가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원양어선단을 철수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었으나 이 같은 저간의 사정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와 판단 없이, 무모하게 외자도입을 한 정부 정책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교훈을 남겼다.  

솔직히 말해서 경제개발 초기에는 이와 같은 경험과 정보에 미숙해서, 실수와 낭비를 초래한 정책이 꽤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의 시행착오는 오늘의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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