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과 휴일 없는 청와대 시절 (47회)
  제6장 국록을 먹던 공직의 바벨탑

이 같은 우리 경제의 당면한 과제를 담당해야 할 주역은 궁극적으로는 기업인데, 그 당시 광공업체 수는 1960년 말 15,572개에서 1967년 말 25,445개로서 대폭 증가를 보여 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과제는 신규 기업체 수의 증가는 물론 이들 기업체 개개가 건실한 성장은 물론, 그 기업규모도 키워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부실화되어 쓰러져간다면,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정상적인 경제운용에서 일부 기업이 부실기업으로 전락되어 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국가의 개발전략에 대해 필요한 내외자 투자자원의 대부분을 정책적으로 지원해주고, 조세감면까지 해주어 가면서 육성해가는 주요기업이 부실기업으로 전락된다면, 특히 그것이 기업이나 거래은행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개발 초기의 구조적 문제라고 한다면, 정부는 이를 그냥 방치해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당시 부실기업 발생원인으로는, 일반적으로 물가안정에 따라 인플레수익의 감퇴, 전반적인 고금리 수준, 기술부족과 시설규모의 과소, 자기자본의 취약과 금리부담의 과중 등이었다. 기업운용형태면에 있어서도 우리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좋지 않은 여러 소문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차관이나 대출 등 지원을 받게 되면 정치자금도 내야하고, 준조세 등 간접경비도 많이 드는데다, 금리 수준은 높고 하니 어떻게 정상적인 생산 활동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매우 일부이기는 해도 차관액의 일부는 해외에 떨어뜨려놓고, 지원금융은 부동산투기나 심지어 자기회사에 사채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요인이야 무엇이든, 부실화된 기업은 특히 그것이 규모가 큰 주요기업일 경우 정부의 산업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기업과 관련 은행만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다 해도 한갓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제반 상황을 고려하여, 특히 고도성장을 추가하는 정부주도형 개발전략의 초기에는 <특별반>을 조직하여 단시일 내에 공정, 신속, 과감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할 것이다.  이 작업의 산업적인 평가는 후일에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10년 가까이 정신없이 고도성장이란 기치 아래 이루어졌던, 정부의 개발전략에 대한 중요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앞으로 경제운용에 있어서 총체적인 자원의 낭비를 방지하고, 여러 분야에 걸친 산업정책 내지는 외자도입 정책이 반성과 전환의 계기를 마런하여, 이 바탕 위에서 중화학공업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기업 경영형태 면에 있어서 “기업은 망해도 기업은 잘 산다”는 말은 있을 수 없고, “기업이 망하면 기업인도 망한다”는 기업경영자세에 대한, 일대 각성을 촉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꼭 강조할 것은 그때와 모든 분야에서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달라진 오늘과 내일의 경제운용에 있어서는, 정부가 이 같은 부실기업 정리에 개입해서는 원칙적으로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 경제는 그때와는 달리 자생력이 충분히 생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충격적인 작업을 단시일 내에 끝내야 한다는, 그 당시의 빗발치는 여론에 따라, 8월말까지 종결토록 계획되어 있어서, 앞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거의 1건씩 대통령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그 브리핑 현장에서 어쩌다가 가끔 대통령과 눈이 마주칠 때에는, 그 분의 그 빛나는 안광을 감내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곤 했다. 

나는 지금도 열심히 경청하며 질문하고 메모하며 하나하나 챙기던 그 당시 대통령의 모습과, 우리 실무자가 무색할 정도의 국정의 여러 분야에 걸친 비상한 기억력에 대해 경탄해마지 않는다. 만약 대통령이 그런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준비과정도 분명히 소홀한 데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 청와대 비서실 근무시절 /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필자이다

이미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산업정책반과 기업정책반에서 나온 자료를 총괄반에서 충분히 검토를 해 최종안이 마련되면 장덕진 특별반장 주재 하에 확대심의회의를 열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최종 보고안을 확정했는데, 만의 하나 실수가 없도록 노력했다. 어떻든 우리는 그때 비장한 각오로 모든 면에서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 

‘우리들의 능력이 모자라고 생각이 미숙한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심에 의해 문제가 생길 때에는 우리 모두 같이 몰락한다.’

이것이 그 당시 우리들의 확고한 마음가짐이었다. 우리들에게는 이 기간동안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전천후로 뛰었다. 해당 기업체에게는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로, 한 치라도 그릇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분석하고 또 검토하느라 일주일에 2, 3일은 밤샘을 했다. 

그때 아이들이 어렸는데 깨어있는 얼굴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출근하고, 자고 있는 한밤중에야 퇴근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술을 마시고 귀가하면 술김에 아이들을 흔들어 깨워서 우는 얼굴이나마 보기도 했다. 

이처럼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다가 청와대를 나오며 어두운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는 심정은 실로 착잡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절강에서 고등고시 시험을 준비할 때에는 모든 것이 여유 있고 좋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이 고되고 힘들다니! 차라리 고등고시 시험을 한 번 더  보는 게 낫겠다.”

같이 일한 동료들과 이렇게 농담을 하며 파안대소하기도 했다.

어렵고 힘이 들었지만 일단 대통령에게 보고가 되고, 결과가 발표되고 나면, 과묵한 대통령께서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들은 어김없이 술집으로 향했다. 스트레스를 풀고 내일의 활력을 축적하기 위한 유일한 낙이었다. 가끔 토의과정에서 의견차이나 충돌이 있을 때에는 맥주잔에다 정종을 주고받으며 애꿎은 술에다 화풀이를 하며 우리끼리 화해를 하곤 했다. 

젊어서 가능했으리라.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스트레스로 천근만근 머리가 무거워진다. 아무리 정확한 데이터에 의해 합리적으로 처리했다 해도, 과연 다니엘과 같은 명판관이었을까 하는, 인간적인 반성을 다시 한 번 해보기도 한다. 

일찍이 효봉(曉峰)스님은 법복을 입은 명판사였다. 그러나 어느 재판에서 오판을 하여 무고한 사람을 형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효봉은 인간적인 양심으로 그 책임을 느껴, 그 길로 법복을 벗고 입산하여 스님이 되었다. 

나는 이 밤에도 이 효봉스님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내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어 본다. 그리고 내 양심에 물어본다. 만약에 그 대답이 나를 꾸짖는다면, 나도 효봉의 뒤를 이어 기꺼이 입산하고 목탁을 두드리며 내 업보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다시 귀를 씻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한 점 부끄럼 없이 공명정대하게 몸과 마음을 가졌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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