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고시의 길 (34회)
  제5장 봉정만리의 여권을 쥐고

2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군복을 벗고 사회생활을 할 때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첫째소리는 사람이란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최선을 다해 일을 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진리였다. 만약 악의 그릇이 차면 하늘이 반드시 그를 죽인다(惡鑵若滿天必誅之)는 진리의 소리였다. 

둘째 소리는 원수와 원망을 맺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현의 말처럼 원수와 원망을 맺지 말라. 인생이 어느 곳에서 또 다시 만나지 않으리오. 길 좁은 곳에서 만나면 서로 피하기가 어렵다(讐怨莫結 人生何處不相逢路逢狹處難回避)는 소리였다. 

그렇다! 이 좁은 땅이라 언제 어디서 만나지 않겠는가!

항간의 속설에 “군대에 갔다 오면 사람이 된다”란 말이 있다. 나도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군대생활을 통해서 인생의 이 두 진리를 터득했다는 것은 큰 소득이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군대에서 제대를 했으나 결코 당황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앞에 한줄기 휘황한 빛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빛을 만나기 위해 대학생활과 군대생활 중에 무던히 몸부림 쳤다. 

한줄기 빛! 그 한줄기 빛은 고등고시 응시의 길이었다. 고시의 언덕에 꽂힌 깃발이 이 쏟아지는 빛 속에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내 조부님은 구한말엽 세 번이나 과거에 낙방하셨다. 그러고는 동학창의(東學倡義)에 가담하여 장렬히 전사하였다. 내가 고등고시 응시의 깃발을 잡는데는 내 나름대로의 포부와 결심이 있었다. 몰락한 지주의 아들로 벽촌에서 뛰쳐나와 온갖 신산고초(辛酸苦楚)를 겪으며 최고 학부와 국민의 3대 의무 중의 하나인 군대도 마쳤다. 

이제 기본적인 1단계의 여건이 갖추어졌으니 가솔들의 식도(食道)를 다스리기 위해 사회의 직업전선으로 나가는 것이 통상 관례였다. 그러나 나의 <바벨탑>은 그런 식으로 쌓아올리기를 거부했다. 여태까지 내가 겪어온 각고의 세월로 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또한 눌린 자와 억울한 약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웅지로 불타고 있었다. 이 차원 높은 일을 성취하자면 ‘고등고시’ 응시는 그 어느 것 보다도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는 말을 믿고 고시준비를 위해 남한산성에 있는 장경사(長慶寺)로 들어갔다. 그때 고시 준비생들이 많이 택하던 절간에서의 공부를 나도 따랐다. 잡답(雜沓)한 시정(市井)에 머물면서 공부하는 것보다 한적한 산사에서의 공부가 몇 갑절이나 더 능률이 오르리라고 믿었다. 삭발을 하고 출가하는 사미승처럼 속연을 끊고 비장한 각오로 입산했다. 

장경사에는 그때 5, 6명의 고시준비생이 묵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5, 6차나 응시한 고참 낙방생도 있었다. 한결 같이 얼굴이 창백한 낙방생들을 바라보니 참으로 애처롭고 동정심마저 일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부하는 법을 며칠 지켜보고는 외람되지만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모여 앉아 잡담을 하고 귀중한 시간을 마냥 노닥거렸다. 전력투구가 아니라 금싸라기 같은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하기야 너무 오랫동안 시험준비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친 터라 새로 시험 준비에 착수하는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믿어진다. 

나는 대학시절의 전공이 법률계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쩌다가 법률에 대한 의문점을 그들에게 물을라치면 경리장교 하면서 술이나 마시던 주제에 이런 상식적인 문제도 모르면서 무슨 고등고시 준비를 하느냐는 식의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이런 분위기가 크게 나를 자극했다. 

‘좋다. 6개월만 지나봐라. 반드시 나는 너희들보다 앞서 있을 것이다.’ 

▲ 장경사에서 주지스님, 고시 동료들과

나는 이를 악 물었다. 그러고는 조부님에게서 들은 소진(蘇秦) 선생의 공부법과 비슷한 방법을 채택하기로 했다. 소진 선생은 공부할 때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천장에다 매어달아 놓았다. 나는 두 다리를 책상다리에 묶었다. 두 어깨 죽지에도 실한 노끈을 걸어 천장에다 아예 고정을 시켜 꼿꼿이 앉도록 했다. 절간이라 전기도 없어 조명이 문제였다. 

나는 서툰 솜씨로 조명기를 직접 만들었다. 깡통 뚜껑의 빤질빤질한 부분을 도려내어 구멍을 뚫고 굵은 철사로 임시 스탠드를 만들어 촛불을 반사하게 했다. 그 반사광선이 책을 향하게 하면 어떤 면에서는 나은 것 같았다. 그야말로 내 나름의 신안 특제품이었다. 차윤(車胤), 손강(孫康)의 반딧불이나 흰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던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윤택하고 풍요로웠다. 

밤중에 졸음이 오고 게으름이 오면 이번에는 장유(張維)의 공부 방법을 떠올려 정신을 바짝 가다듬었다. 

장유는 조선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사람이다. 젊을 때 학문에 뜻을 두고 10년간 공부하러 속리산의 어느 절간으로 들어갔다. 스님에게 외지고 조용한 방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스님은 어느 한 방 앞에 이르러 문을 열어 보이며 그 방을 쓰라고 했다. 그러나 장유가 그 방을 들여다보니 다른 한 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장유는 혼자 쓸 수 있는 독방을 청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아, 저분은 자나 깨나 공부에만 열중하는 분입니다. 두 분이 한방을 써도 저 분은 숫제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아, 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문 앞에서 부산하게 떠들어대도 어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지 않습니까? 안심하고 이 방을 같이 쓰도록 하세요.”

장유가 방안을 다시 보아도 과연 그러했다. 이리하여 장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 주인에게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할 판인데, 너무 열심히 책만 읽고 있어서 인사드리는 것이 되레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장유는 하는 수 없이 장유도 그때부터 책을 내어 공부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뒤에도 공부에만 열중하여 한방에 같이 지내면서도 인사는커녕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어느덧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물론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은 일체 말을 서로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은 공부를 다 마치고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노형! 이거 너무 오래도록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부하느라 피차 수인사도 못했는데, 만시지탄은 있지만 우리 통성명이나 하고 지냅시다.”

그 사람이 말문을 열어 장유도 7년만에야 비로소 인사를 했다. 그 뒤에도 장유는 공부를 더 해서 광해군 때 과거에 급제하여 마침내 큰 선비가 되었다.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당시의 내 머릿속을 언제나 큰 비중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3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하고, 점심식사 후 30분 정도 자는 것을 제외하거는 악착같이 책과 씨름했다. 내 나이로 보나 가정형편상으로 보아서는 단시일 내에 결판을 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피로가 겹치고 영양마저 고르지 못했다. 밤중에는 자주 정신이 몽롱해지고. 전신이 북어처럼 빳빳해지며, 가끔 경험한 일이지만 ‘가사상태(假死狀態)’에까지 빠뜨려졌다. 이럴 때마다 나를 일깨워 세우고 영양을 공급하는 메시아가 있었다. 그 메시아는 후에 나의 메시아가 되었다. 친구의 사촌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내가 경리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에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었고, 매주 빠지지 않고 이대학보를 보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지난 2년 가까이 사귀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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