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작고(作故) (36회)
  제5장 봉정만리의 여권을 쥐고

나는 그때 맹자와 한석봉, 이 두 사람의 어릴 때 일화가 나에게 큰 볼륨으로 용기를 일깨워주었다.

‘그렇다! 일승일패는 병가상사(兵家常事)이다. 그러나 실패는 1회만으로 족하다. 아무리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하지만 치욕스러운 고배를 두 번 마실 수는 없다. 결코 좌절해선 안 된다. 나는 아직도 피부에 탄력이 있고 피가 끓고 있지 않는가! 에디슨은 한구의 전구를 발견하기 위해 수천 번의 실험을 거듭했으며, 로뎅은 진짜 하늘 빛깔을 찾아내는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최후의 승자는 인내하는 자만이 가진다.’

나는 이런 결심 아래 행정고시 재도전의 결의를 굳게 했다.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각오로 재기의 깃대를 높이 꽂았다. 남은 것은 진군이요, 승리뿐이었다. 내 등때기에 콩이 뛰고 입술이 바작바작 탔다. 최후에 웃는 자만이 승리한다는 큰 기침소리 내며  결코 땅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더니, 운명의 여신은 그때 나의 편이 아니었다. 나에게 너무나도 큰 비극의 장을 열어주었다. 

아버지의 운명!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비애였다. 나는 날개가 떨어진 느낌, 우락지감(羽洛之感)을 짓씹었다. 아버지는 간경화증으로 복수가 차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으나 끝내는 불귀의 객이 되어 1966년 9월 10일(음력) 우리 곁을 떠나셨다. 조부님 이래 가세가 기울고 더욱이 소송사건 이후엔 술을 벗으로 그 우환을 다스리셨다. 종손과 과장으로서의 고초고 오죽했으랴!

한(漢)나라 백유(白楡)라는 사람의 일화가 머리를 스쳐갔다. 

백유는 어릴 때 잘못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로부터 매를 맞으며 꾸중을 들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어느 날 또 다시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로부터 매를 맞았다. 백유는 어머니의 그 매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이를 본 그의 어머니는 의아스러워서 그 연유를 물어보았다. 

“백유야, 너 오늘을 어쩐 일이냐? 네가 어릴 때도 나한테 매를 자주 맞았지만 한 번도 오늘처럼 운적이 없었지 않느냐? 그런데 오늘은 네가 어른인데도 매를 맞고 우느냐?”

“어머님, 소자가 어릴 때는 어머님도 젊으셔서 때리시는 매가 무척 아팠습니다. 그러나 어머님, 오늘 다시 어머니로부터 매를 맞아보니 그 매가 조금도 아프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머님이 그만큼 늙으셔서 때리시는 매의 힘도 약하기 때문이옵니다. 소자는 어머님이 늙으셨다는 것이 서러워서 눈물이 나는군요.”

나는 백유처럼 생전에 변변히 효도한번 해드리지 못한 자격지심에서 아버지의 영구차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의 온갖 잔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볏섬을 공기돌처럼 가벼이 드셨고, 씨름판에선 언제나 판막이한 금강역사와 같으셨던 아버지. 6.25 전쟁 때는 나 대신 당신이 총알받이가 되겠다고 내 뒤를 덮쳐주시던 아버지. 나의 상경을 근엄한 얼굴로 허락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척이나 염려하시던 아버지! 내 공부를 위해 애지중지하던 문전옥토까지 팔고 서울로 이주하신 우리 아버지! 아, 나를 위한 아버지의 그 돈독한 사랑이 한 자락 한 자락 이 순간에도 목이 멜 만큼 다사롭다. 

나는 아버지의 유택을 벽제의 용머리에서 구했다. 아버지의 마디마디 서러운 얼이 묻어 있을 고향산천을 일부러 택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유택이나마 우리 유족 곁에 모시면 자주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효자가 어버이 섬길 때   孝子之事親也
기거에 존중하고 공경을 다하고   居則致其敬
봉양에 기쁘고 즐거움을 다하며   養則致其樂 
병드신 때에는 근심과 우려를 다해 애쓰고   病則致其憂 
돌아가셨을 때에는 슬픔과 애도를 다하며   喪則致其哀 
제사는 엄숙함을 다해야 한다   祭則致其嚴   
 
▲ 고시공부 하던 시절 장경사에서
 
공자는 명심보감 효행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도 호천망극(昊天罔極)한 아버지의 인정(人情)에 나는 한 웅큼의 보답도 못해드렸다. 생전에 황금마차를 태워드리지 못하고 천도(天桃)하나 따드리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 돌아가신 망후에도 비좁은 공동묘지에 세 드셨으니, 남은 고자(孤子)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짖어지는 듯 아프다. 

정송강(鄭松江)의 시조를 경건함 마음으로 읊조리며 삼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난 후에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는 명실공이 우리 집의 호주가 되었다.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28세의 젊은 나이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어 가뜩이나 좁은 내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씻은 듯이 가난한 우리 집안에 할 일이 많은 나는 내 나름대로의 인생과 가정 설계로 바작바작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이때 나에게는 내 인생에 있어서 막중대사인 결혼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에게는 아버지 생전에 장래를 약속해둔 약혼녀가 있었다. 전주 이 씨 문중의 규수로서, 선대의 고향은 충청도이나 본인은 서울에서 생장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시집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을 잇고 빈소를 모시자면 내가 성혼을 하는 것이 되레 큰 효가 된다는 것이 우리 문중 어른들의 집약된 의견이었다. 나는 완강히 반대했다. 아버지의 3년 상은 못치를 망정 최소한 1년 복은 입어야 하니 결혼문제는 천부당만부당하다며 이 권유를 정면으로 일축해버렸다. 

그러나 집안어른들의 권유도 집요했다. 이미 아버지 생전에 두 사람 사이 약혼한 사이이며, 규수도 과년했으니 성혼을 하는 것이 한 치도 불효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편 나의 약혼녀는 어떠했는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데다가 충청도 출신이라 희로애락의 감정을 밖으로 잘 내뿜지 않았다. 청풍명월이란 전형적인 충청도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결코 사랑을 헤프게 나불대는 해까운 클레오파트라가 아니었다. 밝으나 어두우나 그 빛깔을 가볍게 밖으로 드러내는 여인이 아니었다. 

대체로 우리의 전통적 여성미로 흔히 성춘향을 꼽는 경우가 많다. 춘향전 전편(全篇)을 읽어보아도 어느 곳 한번 그 미(美)가 빼어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저 수수 여운간지명월(如雲間之明月)이라했지만 춘향을 만고절색으로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다. 

감히 이와 직접 비교야 될 수는 없지만 나는 내자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딱 부러지게 집어낼 수 없다. 그러나 그 은은한 속에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 만나지 않으면 마음이 타고, 만나면 어딘지 좋은 그런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나는 첫사랑의 환부를 도려내고 100년을 함께 할, 가장 우아하고, 청송에 앉은 학같이, 심산유곡의 난초같이, 맑은 천성을 가진 여인을 찾던 중 요행히 내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기연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내가 첫사랑의 여인과 사별한 뒤에도 그 첫사랑을 잊지 못하던 그즈음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몹시 괴로워한다는 내자의 사촌오빠인 내 친구를 통해 내자가 들었을 때 나도 그런 사람과 한번 사귀어봤으면 좋겠다고 한, 찬사로부터 출발되었다. 

 
  좌절의 늪에서 (35회)
  결혼과 취직 (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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