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괴 이송한 야반의 대작전_1 (40회)
  제6장 국록을 먹던 공직의 바벨탑

뒤에 안 일이지만, 그때 행정고시의 재경직(財經職) 합격자는 모두 6명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행정법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행정법 시험문제 하나가, 지방자치법 중에서 나왔다. 지방자치제가 아직 시행되고 있지 않아서 아마 대부분의 수험생이 이 분야에 대해서 소홀이 했으리라 믿어진다. 

아무튼 그 합격으로 내 인생은 확실히 일대 전기가 마련된 셈이었다. 그 옛날 장원급제가 되어 어주(御酒) 삼배를 받고 어사화를 받던 그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오늘의 이 광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가! 용이 여의주를 얻은 기쁨이 이만큼이나 클까? 왕상(王祥)이 고빙(叩氷)하여 잉어를 얻고, 맹중(孟宗)이 읍죽(泣竹)하여 눈 속에서 죽순을 얻은 기쁨이 이보다도 컸을까?

나는 옛날처럼, 삼일유가(三日遊街)를 하고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한 거나 진배없었다. 내자와 더불어 벽제의 용미리에 누워계시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를 위시한 조부모와 조상들의 음덕이라고 여기고, 경건히 향불을 사르며 큰절을 올렸다. 

“아버님, 소자는 기어코 해냈습니다. 조부님이 세 번이나 낙방하여 한이 맺히셨던 그 과거와 같은 고등고시를 기어코 해냈습니다. 생전에 그렇게도 바라시던 일 이루어졌는데,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우리 가문도 새로운 전기가 될 것입니다. 부디 우리들 걱정 마시고 고이고이 잠드소서.”

자리에 서 일어나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조상들의 선영을 생각하며 망배를 올렸다. 문득 허굴산의 장군바위와 용바위를 회상했다. 어릴 때 그 바위들을 보고 위대한 장군이나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꿈꾸었던 바위이다. 두 눈 언저리가 다시 찔꺽해오고 5월의 훈풍이 살갖을 간질이며 축복의 말을 해주는 듯 했다.    

행정고시의 영관을 쓰게 되니 이제 전공과 관련해서 재무부의 발령을 받으면 되었다. 그 발령으로 국가공무원이 되고 국록을 먹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합격 후 1년을 기다리는 것이 그때의 관례였다.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로 그때만 학수고대하며 나날을 보내었다. 그래도 장래가 보장된 학수고대라서, 전날의 절망적인 불안과 초조와는 결코 동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가 찾아와서 뜻밖의 일자리를 일러주었다. 흥국자전거회사의 경리과장직 이었다. 그리로 가서 재무부 발령을 기다리며 1년 동안만 일해보라는 제의였다. 그 당시 삼천리자전거 회사가 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주름을 잡고 있었으니 흥국자전거회사는 그보다도 역사가 더 오래로 업계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유수한 회사였다. 

나는 이 친구의 권유를 기꺼이 응낙했다. 재무부의 정식 발령을 기다리자면 1년이 걸리므로 그동안의 무료한 공백을 메꾸는데는 안성맞춤이라 여겨졌다. 참으로 그 친구가 고마웠다. 생일날 잘 먹으려고 사흘을 굶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도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고 눈만 끄덕거리는 식솔이 있기에, 마냥 책상다리로 허송세월만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기꺼이 그 회사에 입사, 경리과장 겸 기획과장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군대에서 제대하면서 터득한 성심성의로 일해야 한다는 진리는 이 회사에서 일할 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차로 이 회사의 경영진단부터 했다. 그 진단결과에 따라 제품관리와 재고관리를 합리화하고 겅리장부 조직을 개선했다. 본사의 이와 같은 제도개혁을 전국조직으로 확산시켰다. 이 갑작스런 조치에 처음엔 상당한 반발을 예상했으나, 내가 그 회사에 얼마 안 있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순순히 따라주었다. 

문제는 내가 그 회사를 그만둔 뒤에 일어났다. 내가 그만두자 이 같은 일련의 개혁조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 뒤 사주(社主)가 사망하자 회사마저 망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철도청 발령이 났다. 1년이 채 안된 때에 선례에 없는 정부발령이 내려졌던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 발령을 반려했다. 그 당시에는 발령을 세 번까지는 거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재무부로 들어가고 싶었다. 
 
▲ 재무부 행정관 훈련과정을 수료하고/ 밑에서 2번째줄 오른쪽에서 5번째가 필자이다

드디어 그 해 9월에 재무부 직속인 세무공무원교육원 교수요원으로 발령이 내렸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비로소 대망이 국가공무원이 된 것이었다. 세무에 대한 교육은 내 전공과 관련 있어서 그만큼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이제는 내가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자긍심으로 부풀어 있었다. 

한 달쯤 뒤였다. 이번에는 내가 거꾸로 다른 48명과 함께 교육을 받게 되었다. 고급관리자교육이었다. 우리는 착실히 교육을 받았다. 그때 함께 수강했던 49명은 그 뒤에 <49인회>를 조직하여 지금껏 유대를 공고히 하고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그 뒤 차관 이상이 10여명 되고, 대부분 이사관 이상으로 정부 각 부문에서 열심히 봉직하였다. 

나는 이 교육을 마치기가 무섭게 재무부 기획관리실에 발령이 났다. 정식으로 재무부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나는 신명이 나서 열성과 땀을 부어 맡은 일을 차질 없이 착실히 해나갔다. 

기획관리실의 일원이 되어 처리한 일 두 가지만 소개한다. 

먼저 국가 비상시에 대비한, 소위 충무계호기 수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계획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처음으로 각 부처별로 시행된 것인데, 나는 이 계획의 총괄 주무사무관이었다. 

이 계획 중 우리가 가장 고심하고 있던 문제는,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금괴(金塊)의 처리 문제였다. 그 당시로서는 국가 1급 기밀에 속하는 문제였으나, 지금은 그때로부터 이미 수십 년이 지났고, 또 현재의 보관관리 상태와는 전혀 관계없는 상황이어서 흘러간 이야기로 주저 없이 이 자리에 공개한다. 

우리나라 화폐는 태환지폐(兌換紙幣)가 아니므로 한국은행 보유 금괴와 직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 자산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자산이다. 이 같은 중요한 국가자산을 만약의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미리 안전지대로 이동 보관해두는 것이 6.25전쟁 때의 경험에 비추어 대단히 중요했기 때문에 다른 계획과는 달리 분리하여 단일 계획으로 수립되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이 계획에 따라 재무부 책임자 2명, 한국은행 책임자 2명이 행정책임을 지고, 육군헌병차감 책임 하에 중무장한 헌병장교 7명으로 호위수송단을 편성해, 김포공항에서 공군 수송기로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모일 자정이 넘자, 우선 군 트럭에다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그 금괴를 실었다. 트럭 앞뒤에 각각 중무장한 헌병 백차(白車)를 배치하고, 김포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한밤중인데다 워낙 중대작전이라 몹시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되었다. 마치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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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괴 이송한 야반의 대작전_2 (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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