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첩대 대원과의 만남 (18회)
  제3장 추풍령 울고 넘은 청운의 뜻

분노와 환멸의 비애는 기하급수적으로 가속이 붙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그만큼이나  컸다. 그와 동시에 시골소년인 나는 잡지사의 사장은 모두가 위대한 잡지를 내는 그 기본이념이나 정신과는 거리가 먼 위선자요, 이중인격자란 생각마저 들었다. 물색도 모르는 나는 청소년을 위해 좋은 잡지를 내는 사람이면 애독자요, 불우한 청소년인 나를 틀림없이 써 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장안이 크고 넓다지만 나는 강렬한 소외감과 허탈감과 상실감을 그때 짓씹었다. 한길이 넓고 사통오달이었지만 나는 갈 곳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하여 발부리가 어디에 닿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나중에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나는 남산공원의 높은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무기력해진 나는 숨이 차오르고 눈앞이 아물아물했다. 생각하니 나는 그때까지 아침밥을 거르고 있었다. 간신히 층계 끝까지 가 돌난간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아침햇살을 받은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전쟁으로 많이 부수어지고 깨어졌지만, 서울은 역시 수도답게 광활하고 웅대했다. 

이 광활한 공간에 저렇게도 집이 많은데, 내 6척도 안 되는 몸 하나 의지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고독감이 고개를 휘저으며 엄습해왔다. 11월의 서울바람은 으실으실 춥고 가난한 내 가슴에 윙윙 소리 내어 불어댔다. 

그러나 아까의 김익달 사장의 충고처럼, 그 길로 도로 환고향할 수는 없었다. 부모나 동민들이 나의 나약한 의지를 어떻게 보겠느냐는 생각이 나를 추슬러 세웠다. 뵈온 적은 없지만 의병수장으로 장렬하게 전사한 큰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환청이었다. 이때 내 앞에 낮선 군인 한 사람이 다가왔다. 군복은 입었지만 계급장도 안 단 것을 보니 정규 군인이 아닌 듯 했다. 그 군인은 내 의복과 소지품을 뚫어지게 훑어보더니, 어디서 와 무얼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목소리가 외양과는 달이 퍽 부드럽고 상냥했다. 

나는 갖은 언어를 동원해서 고향을 떠난 동기와 조금 전 <학원>사에 들렀던 비참사(悲慘事)를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 군인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실로 생게망게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알았어. 날 따라와. 있을만한 곳을 네게 안내해주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긴가민가해서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군인은 다시 채근했다. 
“너 가기 싫어? 싫으면 관두어라.”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따라가겠습니다.”

나는 보퉁이를 들고 그 군인의 뒤를 따랐다. 이판사판이라 겁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토정비결의 점괘가 아니라 현실에서 귀인을 만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욱이 오갈 데 없이 천 길 낭떠러지에 선 급박한 내 신세였기에 눈이 번쩍 뜨이며 생기가 회오리쳤다. 
 
그 군인은 나를 데리고 지금의 리라초등학교 자리에 있는 천막으로 쏙 들어갔다. 설명을 듣고보니 그곳은 남산직업소년학교라고 했다. 중부경찰서 권응팔(勸應八)이란 순경이 불량아를 선도하기 위해 세운 야간학교라고 했다. 전쟁고아나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불우한 소년을 모아 밤이면 대학생이 와서 가르쳐주는 야학이라 했다. 

그 옆에는 관리숙소도 있어 자는 것은 무료이며 각자가 돈을 벌어, 먹는 것을 해결하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마련한 학교라 했다.
 
▲ 상경 직후, 방첩대 대원과 남산에서

그 군인은 알고 보니 옛날 KBS방송국의 언덕바지에 자리잡은 방첩대의 대원이었다. 나는 그 직업소년학교에 소개하고는 방첩대로 데려가서 밥을 먹여주었다. 마침 나는 허기가 져 눈앞에 헛거미가 잡히던 때라 주접스럽게도 그 밥그릇을 비웠다. 구부정한 허리가 펴지며 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때 그 군인이 참으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봐, 내말 오해하면 안 돼.”
“무어 말입니까?”
“응. 네 가지고 온 돈은 모두 내게 맡겨라. 가지고 다니다가 깡패들에게 빼앗기면 어떡하니? 내가 잘 보관해줄게. 이리 내어 놓아라.”

나는 무척 당황했다. 얼마 되지 않은 돈이지만 그건 될 말이 아니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가. 피땀 흘려 농사지은 고추팔고 깨 판, 실로 눈물겨운 돈이 아닌가. 내 머릿속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그 돈을 맡기느냐 거절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러나 결국 그 돈을 군인에게 맡기고 말았다. 그것은 그 군인의 주선으로 숙소가 해결되었고, 야학이나마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 군인을 무작정 의심만 할 수만은 없었다. 설령 그 돈을 몽땅 떼인다 하더라도 우선은 서울에서의 기숙이 해결되었다는데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또 하나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날더러 초등학교 6학년 과정에 입학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완강히 반대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아이들보다 중학 입학이 3년이나 늦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생결단 애원했다. 그동안 시골에서 중학강의록을 받아보아 중1의 실력은 너끈히 갖추었으니 중1과정에 펀입시켜 달라고 했다. 

이 불타는 향학 의욕과 간절한 애원이 마침내 그들을 움직여 간단한 실력 테스트를 받기로 했다. 중학강의록으로 닦은 실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수학문제는 방정식이라 무난히 풀었고, 영어도 독해는 별만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독학이라 회화에 자신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어의 리딩이 좀 걸린다고는 했지만, 중1과정의 편입을 허가한다고 했다. 

이 말을 듣자 소리 내어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1차 관문이 뜻대로 성취되었으니 이보다 더큰 영광과 감격이 없었다. 비록 야학이라고는 해도 일구월심으로 바라고 바라던 중학진학이 이루어진데 대해 다만 감사할 따름이었다. 
 
밤이 되었다. 서울에서의 첫날밤이었다. 숙소는 땅을 파서 그 둘레에다 판자를 세우고, 그 위에는 천막이 덮였다. 바닥에도 판자를 깔고 그 위에 천막을 깐 움집이었다. 벽 쪽으로 붙어 담요 한 장을 덮고 누웠으나 만감이 교차하였다. 

따뜻한 시골 방을 두고 이 천리타향 천막집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다니! 동시에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조부님, 피를 나눈 동기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한량없이 그립고 더없이 처량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를 꽉 물었다. 그러자 언젠가 읽은 소설책의 글귀가 떠올랐다. 

“대(竹)는 눈 속에서 마디가 늘고, 찬란한 진주는 병든 조개 속에서 그 부피가 는다.‘

토마스 칼라일의 말도 떠올랐다. 

‘기나긴 밤을 울어 새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 

이런 말을 되뇌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다. 그러나 피로로 잠이  억수로 퍼부울 줄 알았는데, 추위와 외로움 때문에 깊은 잠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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