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근야독의 시작 (19회)
  제3장 추풍령 울고 넘은 청운의 뜻

이튿날 아침에 사감이며 연세대 법정대학에 다니는 전석인 선생에게 인사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직업소년학교를 발전시키려고 무던히 심혈을 쏟던 대학생이었다. 그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구두통과 구두약과 구두솔을 주며, 선배들을 따라가 구두닦이 일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현실은 참으로 냉혹했다. 놀고는 먹지 못하는 것이 무서운 현실이었다. 낮에는 무언가 일을 해야 연명이 되며, 글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 주선에 토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더욱이 주변머리 없고 속수무책인 내겐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나는 구두통을 메고 선배 아이들을 따라 천막을 나섰다. 지금의 충무로 입구로 내려오니 신세계 부근이었다. 당시는 미군 PX, 제일은행, 상업은행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다른 건물은 폭격으로 거의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실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중앙우체국도 폭파되어 붉은 벽만 달랑 남아 서 있고, 한국은행 본부도 반이나 파괴되어 있었다. 명동의 중국대사관 골목과 지금의 미도파 맞은 편의 뒷골목에는 암달러상이 득실거렸고, 명동일대에는 거지행색을 한 깡패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 작업복을 꺼멓게 물들여서 입었는데, 갈갈이 찢어서 너울거리게 하고는 깡통을 들고 얼굴과 손에 검정 칠을 하고 다니며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나는 구두를 닦는 절차와 기술을 배우느라 선배들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그 기술이나 요령은 이내 습득되었다. 

나의 새로운 생활의 지평이 열리고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으면 그런대로 짭짤하게 돈이 들어왔다. 어쩌다가 후한 손님을 만나면 약간의 팁도 받게 되어 심심치 않았다. 그 번 돈으로 꿀꿀이죽이나 볶음밥을 시장의 좌판에 앉아 사먹으며 지내면서도 야학에 나가 공부하는 일은 결코 거르지 않았다. 온종일 구두를 닦느라 한 길을 누비고 쏘다녀 밤이면 피곤하고 무지무지하게 졸렸지만,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1주일이 지나자 구두닦는데는 이골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구두를 닦으며 명동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난데없이 깡패일당이 나타나 나를 에워쌌다. 일당은 모두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 하는 체념과 동시에 일말의 공포가 스멀스멀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깡패들이 구두닦이나 껌팔이, 신문팔이들을 덮쳐 돈을 빼앗아간다는 사실과 습격을 당했을 때는 반항하지 말고 고분고분 소지금(所持金)을 다 내주어야 한다는 충고를 선배들로부터 듣고 있었다. 만약 반항을 하면 깡패들은 자기들의 소굴로 납치해가서 부하나 바람잡이로 만든다고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때까지 번 돈을 꺼내려고 손을 호주머니에다 쑤셔 넣을 때였다. 
“가만. 너 이름이 뭐냐? 어디서 왔어?”

사뭇 위압조로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까만 색안경을 끼고 옷도 미추룸하게 입고 있었다. 그 순간 그가 일당 중 왕초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의 내 눈물겨운 생활의 편린과 향학 의지를 비교적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애들아, 가자. 이 아이한테 손대는 놈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을테다. 판제야. 앞으로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철저히 보호해 줄테다.”

뜻밖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더니, 내 굴절없는 신세타령이 그 두목에게 빛깔이 짙게 감동을 준 듯 했다. 참으로 위기일발이었다. 호구(虎口)에서 빠져나온 토끼처럼 비로소 안도의 숨을 후욱 쉬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 깡패에게도 인간적인 일면이 아직은 남아있고, 의리를 무겁게 지킨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 모습을 오래도록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덕택인지 몰라도 그 후로는 아무도 나에게 집적대는 자가 없었다. 

이런 파란을 겪으면서도 착실히 구두를 닦았다. 그리하여 번 돈을 밤이면 언제나 학교 교무주임에게 예금했다. 이렇게 생활이 질서를 찾고 안정되자 방첩대 군인을 찾아가 밭겨 둔 돈을 달라고 했다. 그 돈을 찾아다가 교무주임에게 함께 맡길 작정이었다. 
 
▲ 중학시절, 남산에서 / 오른쪽이 필자이다

그런데 그 군인은 찾아갈 때마다 돈을 내어놓지 않았다. 되레 자기가 맡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구차한 설명만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두어 달 뒤 다시 찾아가니 그 군인은 이미 타처로 전출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대경실색을 할 노릇이었다. 

‘아, 그 돈이 어떤 돈인가. 부모님이 고추 팔고 깨 판 눈물과 정성이 묻은 돈이 아닌가. 게다가 김익달 사장의 사랑이 묻은 돈을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느냐, 호박씨 까서 한 입에 털어 넣었구나. 나는 그 군인의 조끼 밑에 뛰는 심장을 보지 못했어.’

나는 돈을 섣불리 맡겼다는 것을 가슴이 찢어져나가도록 뉘우쳤다. 그 군인의 심악스런 마음씨에 현대판 유다를 보는 것 같아서 침 뱉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 뒤에는 바뀌었다. 돈을 떼인 것은 아까웠지만, 그 군인 덕분에 야학이나마 진학이 되고, 요만큼이라도 생활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니 마냥 그 군인의 배신한 소행머리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공과가 상쇄된 것이었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군인이 전출하느라 그 돈을 갚을 것을 잊어 먹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백보 양보해서 생각하면 그 당시는 전쟁 중이라 돈이 귀하고, 군인의 생활도 말이 아니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솔직히 오늘 이 시점에서도 그 군인을 원망하지 않는다. 내 70평생에 만난 귀인 중의 한 사람으로, 아직 좋게 각인되어 있다. 

이런 일이 있은 며칠 뒤였다. 나는 그 날도 거리에서 번 돈을 맡기려 교무주임에게 갔다. 

“판제야. 네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이제 예금하지 말고 밥이나 제 때 사먹어 가면서 일해라. 아 글쎄, 건강이 있고 돈이 있는 게 아니냐? 지금까지 예금해둔 것 다 돌려주겠다. 네가 가지고 알아서 쓰도록 해라.”

나는 그날로 번 돈을 다 내가 보관하게 되었다. 꽤 되는 돈이었다. 그 돈을 보자 마음이 뿌듯하고 흡족했다. 살아가는데 자신도 생겼다. 

그즈음 나는 고향의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점원 생활을 하며 편안히 지낸다는 거짓 편지도 썼다. 비록 거짓말을 했지만 그것은 그때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의 한 페이지에서 근심을 덜어내자 나는 욕심이 생겼다. 좀 더 따뜻한 방에서 공부에 열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싸구려 하숙집을 구해 나갔다. 후암동 산비탈 판잣집이었다. 이북에서 피난 와 딸아이 셋을 데리고 살고 있는 집이었다. 비록 한방에 어른 셋과 합숙하기는 해도 연탄불이 따뜻해 살 것만 같았다.  
 
이때 나는 벌써 중2가 되었기에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추워서 달달 떨던 남산직업소년학교 관리숙소 시절에 비하면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더니 이 행복한 생활에도 불만은 있었다. 함께 합숙하던 사람들은 저질이어서 밤이면 밤마다 돈내기 화투를 치고, 술을 마시고 듣기 거북한 상소리를 밥 먹듯이 했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려고 해도 이 도가니 속에서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으로 부지불식간에 물들어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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