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상대 합격 (23회)
  제3장 추풍령 울고 넘은 청운의 뜻

3학년 2학기가 되어 한껏 입시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이 공부에 쐐기가 걸리고 뜻밖에도 걸림돌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근무하는 공군인쇄소 연락사무소의 존폐문제였다. 단적으로 말해서 더 이상 존재 의의가 희박하다는 맹랑한 진단이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민간 인쇄소가 재정비 되거나 확장되어 굳이 공군인쇄소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의 인쇄소가 민간 일을 맡아한다는 것도 군기에 위배된다는 의견이었다. 그때 민간 일도 전과는 달이 많이 줄어든 것이 변수 중의 하나였다. 

이 꺼림칙한 기별을 전해 듣자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논바닥이 마르면 올챙이는 죽게 되고, 대가리를 삶으면 귀도 저절로 익는 법이 아닌가. 천재일우의 직장을 잃게 되면 나는 속수무책이 된다. 입시를 위해 한창 피치를 올려야 할 가장 중대시기에 숙식마저 걱정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쌓아올린 바벨탑이 일시에 와르르르 무너지고 말 위험성마저 배제하지 못했다.  

천만다행으로 공군인쇄소의 최지수 소장, 최병진 소령과 박기연 대위 등 간부들이 의논하여 내가 졸업할 때까지는 연락사무를 과도적으로 존속하기로 조치를 내려주었다. 

아무리 나의 지금까지의 행동거지에 상응하는 종과득과(種瓜得瓜)요, 종두득두(種豆得豆)라지만, 세상에 이 분들보다 더 고마운 분들이 또 어디 있겠느냐! 그 분들의 그때의 파격적이고도 초인적인 가호와 후의에 지금도 나는 감읍할 따름이다. 송구스럽고도 한편으로는 흔감한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학업에 더 전념했다. 

이러는 사이에 어느덧 고3의 2학기도 저물어 입학원서를 내는 시기가 도래했다. 그때 고려대와 연세대에 무시험 전형이 있었다. 입학 정원의 10% 이내로 성적이 우수한 자를 서류를 전형하는 방법이었다. 그 응시 자격은 성적이 재적수의 2% 이내에 들고, 2~3학년의 성적이 평균 90점 이상이라야 했다. 

이 문제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서 가슴을 태웠다. 어느 날 박창수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궁금중에 내가 조마조마해하고 있는데 담임은 참으로 뜻밖에도 고려대학교 상대의 무시험 전형에 응시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네 3학년 성적은 90점을 넘어 별 문제가 없는데 2학년 성적이 간드랑간드랑 하거든. 좀 걱정이 되지만 밑져봐야 본전인데 원서는 일단 내어보는 게 어때? 만약 떨어지면 본고사를 보는거구 말야.”

담임의 이 말을 듣자 금방 얼굴에 모닥불을 담아 붓는 것처럼 뜨끔했다. 그와 동시에 남들처럼 공부에만 매달리지 못하고 주근야학하는 바람에 대학입학을 위한 기본 성적이 조금 모자라게 되었다는 후회가 목구멍으로 궁글러 올라왔다. 

담임의 권유에 따라 고려대학 상과대학에 응시하기로 했다. 만약 무시험에서 낙방이 되면 본고사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네 탓 내 탓을 가리기 전에 이미 엎질러진 물을 낙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시험 전형의 응시를 해놓고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입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문득문득 무시험전형의 결과가 과연 어떻게 나오나 하고 기다려져서 불안과 초조감이 꼬리를 물고 엄습해왔다. 더욱이 낮에 사무소의 일을 볼 때에는 이 불안과 초조감이 더더욱 기승을 부려 좌불안석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강복(降福)인가! 마침내 고려대학의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그것은 더함 없는 감격이요 광영이었다. 별나라의 악사들이 피리를 불어주고, 바다도 흔희작약하며 내 이 광영을 함께 축복해주는 듯이 느껴졌다.
 
▲ 덕수상고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는 공군인쇄소 연락사무소에서

혈혈단신으로 추풍령을 울면서 넘어 온 내 청운의 뜻이 오늘에야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한없이 기뻤다. 하늘의 태양은 더욱 빛났고 북악의 찬바람도 오늘따라 계절의 여왕 5월의 훈풍처럼 살갗에 매끄러웠다. 일구월심 뼈를 깎고 체중이 내리던 지난날의 각고가 다 오늘을 위해 존재했다고 느껴졌다. 

그 파란만장이이 한 장의 합격통지서로 잔잔해졌다. 나를 삼킬 듯이 미쳐 날뛰던 태풍의 눈도 청맹과니가 되고 말았다. 이 길보가 전해지자 공군 인쇄소는 물론 공군 정훈감실까지 축하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은 시골뜨기 청년의 굳은 의지의 승리라며 극구찬양을 했다.

그러나 인간은 용렬한 동물이라서 가장 작은 농(隴)나라를 얻으면 그보다 큰 촉(蜀)나라를 얻고 싶어 한다더니, 엉뚱한 욕심이 생겼다. 이왕이면 서울대학교 상대의 본고시에 한 번 응시하자는 욕심이 생겼다. 내 학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만 없다는 한 자락의 오만이 비온 뒤의 독버섯처럼 내 의식 속에 솟아올랐다. 

이 오기는 이내 무산되었다. 서울대학교 상대의 본고사 일자와 고려대학교 상대의 구두시문(口頭試問) 일자가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고대를 가느냐, 고대를 포기하고 서울대를 가느냐 하고 그 기로에서 무던히 방황했다.

주위 어른들의 간곡한 권유와 나의 비장한 결심은 마침내 고대를 택하게 했던 것이다.

내가 대학의 상아탑으로 발을 들이민 1960년은 우리나라에도 새 역사의 장이 열리던 해이다. 제4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서거했으며, 3월 15일 마산 부정선거 규탄 데모에 이어 4.19의거가 일어났으며,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물러나고 그해 8월 23일엔 제2공화국의 장면(張勉) 내각이 민주와 자유의 기치를 들고 새 출범을 했던 해다. 

이렇듯 희망찬 새 나라의 정치 출발과 발맞추어 나의 대학생활도 큰 포부와 희망의 길 군악(軍樂)이 시작되었다. 내가 입학등록금을 낼 때였다. 이때에도 남들처럼 경제적인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입학축의금이 각처로부터 답지했기 때문이다. 공군본부와 정훈감실을 위시해서 인쇄소 연락사무소에 드나들던 각 출판사 사람의 온정 어린 축의금이 답지하여 등록금을 내고도 오히려 얼마만큼의 돈이 남았다. 

세상에는 합격을 해놓고도 등록금이 없어서 아등바등하는 안타까운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런 사람과는 달리 적어도 그 당시만은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았다. 천리 객지에서 사고무친인 내가 이 어려운 숙제를 아무 걸림돌 없이 거뜬하게 해결해냈다는 긍지가 도저히 나를 앉아 있게 하지 않았다.

틈을 내어 고향에 갔다. 아직 금의환향까지는 못되어도 이 합격의 광영과 주위 어른들의 온정을 집안 사람들과 함께 만끽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고향에 닿자 조부님과 부모님께 먼저 큰 절을 올리고, 등록금 내고 남은 돈을 가계에 보태 쓰시라고 부모님께 드렸다. 이 돈의 출처를 들은 어른들의 경탄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특히 조부님의 그때 당부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판제야 참으로 대단하구나! 우리는 응당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하였는데도 네가 오늘의 광영을 가져왔구나! 그것은 근위무가보(勤爲無價寶)요 신시호신지부(慎是護身之符)라고 한 저 태공(太公)의 말대로 네가 부지런하고 처신을 잘 했기 때문이다. 부디 그 분들의 어긋남이 없도록 앞으로도 각별해 유의해라.”
 
내가 이렇게 벼락치기 고향방문을 마치고 상경하자 또 하나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생각하지도 않은 굴러 들어온 호박이었다. 서울대 교수이면서 출판사를 경영하던 분이 내게 가정교사를 의뢰한 것이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그것도 아주 입주 가정교사였으니 참으로 안성맟춤, 금상첨화였다. 어차피 대학 4년 동안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판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망외(望外)의 천우신조였다. 

더운밥 찬밥 가릴 것 없이 나는 그날로 그 교수님 댁으로 입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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