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탐구의 각오 정립 (24회)
  제3장 추풍령 울고 넘은 청운의 뜻

입학이 되고 숙식이 되자 내게는 여지껏 가슴의 응어리로 남았던 할 일이 고개를 내어 밀었다. 그것은 몇 해 전에 우리 집을 패가(敗家)시킨 그 소작권 소송사건의 비리를 캐어내는 일이었다. 

먼저 서울대법대 3학년인 양승규 선배를 찾아가 이 사건에 대해 상의했다. 양승규 선배는 좀더 법률전문가의 명확한 해석을 듣는 것이 좋겠다며 그가 잘 아는 고재필 변호사라고 있는데, 함께 가 만나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 친절에 감사할 지언정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바루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변호사는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힘없이 가로저었다. 

“아뿔싸! 이 건은 그때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어야 하는 건데 이미 법정 상고시효가 소멸되었군. 시효소멸에 관계없이 상고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고 엄격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할 거야.”   

나는 이 법률전문가의 단언을 듣자 맥이 탁 풀렸다. 쥐었던 여의주라도 놓친 듯이 허탈감에 빠졌다. 일이 이렇게 되면 도리 없이 그 당시의 재판장을 찾아가 그 경위나 따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카네기의 말이 생각났다. 

“사리를 밝힐 줄 모르는 자는 천치요, 사리를 밝히지 않는 자는 고집쟁이요, 사리를 밝히기 전에 두려워하는 자는 노예이다.”

고재필 변호사를 통해 수소문한 그 당시의 재판장은 소공동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잰걸음으로 찾아가서 세 차례나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승소장의 복사본을 제시하며 고등법원의 판결이 어떻게 하여 그렇게 엉터리로 되었느냐고 시시콜콜 따지고 들었다. 

“학생. 미안하네. 재판장은 신이 아니기에 가끔 이런 실수가 잇는 경우가 있지. 더욱이 그 당시는 전시라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본의 아니게 이런 결과를 빚어내게 되어 뭐라 할 말이 없네.”

딴은 그러했으리라. 강산이 산산조각이 난 전시라 공명정대해야 할 재판인들 무슨 경황이 있겠느냐. 지금에 와 항의를 해봤자 천망(天網)이 다 새던 그 당시의 조차전패기간(造次顚沛之間)을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이 뻔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영국의 버나드쇼가 말한 명언을 생각했다. 

“술이 이제 반밖에 안 남았구나 하고 절망하지 말고, 술이 아직도 반이나 남았구나 하고 생각하라.”

그렇다! 우리 집이 그 소송으로 인해 일패도지(一敗塗地)의 길을 걷게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돌려 생각해보면 그 앙금 때문에 되레 전화위복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복수의 결의란 동기부여가 밑거름이 되어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사각모를 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코 난 이 이상 이 건에 대해 집착하지 말자. 그러다보면 공부고 나발이고 다 증발이 되고 만다. 내가 장차 성공해서 그 논 서마지기를 도로 사들이면 되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의식전환을 한 다음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정진하기로 했다. 진리탐구를 하지 않은 대학인은 노래 하지 않은 가수와 같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출발했다. 
 
그러나 입학의 환희와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저 청사에 남을 4.19혁명이 일어났다 4월 18일 부정선거에 대한 의분을 참지 못해 고대인은 도시락과 가방을 들고 교문을 박차고 나섰다. 우리는 상과대학 학생회장 이기택 선배와 법전대학 학생회장 이세기 선배의 현명한 지휘 아래 동대문으로 돌진했다.
 
젊은 학도들의 뜨거운 피가 끓어 그 의기가 사뭇 하늘에 사무치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구호는 서울 장안을 진동시켰다 정의를 위해선 칼날도 밟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선 꽃다운 목숨도 바치겠다는 의연한 의지가 거리에 출렁출렁 넘쳐났다. 
 
▲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학우들과 / 가운데가 필자이다

시민들도 여기에 가담하는가 하면 혹은 보도에서 박수를 보내며 우리의 장거를 진하게 고무 격려했다. 한 치의 에누리 없는 사자분신이요, 맹호출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동대문 양쪽 옆에서 저지하는 경찰관으로 편성된 저지부대의 협공을 받았다. 거기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일부 고대인과 충신동 뒷골목을 돌아 종로의 파고다공원 앞으로 나왔다. 우리의 최종 집결지가 국회의사당 앞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소나기처럼 곤봉세례를 받았다. 흘낏 뒤돌아보니 순경이 내 어깨를 내리치고는 나꿔채 공원 앞 파출소로 연행했다. 이미 10여명의 고대 학생이 잡혀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붙들려 왔다는 억울함보다도 선배나 동료들이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부글부글 끓고 이가 덜덜 갈렸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정의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키겠다고 일어선 학생들에게 상을 못줄 지언정 이게 무슨 망발된 철주냐 싶었다. 분노에 떨고 있는데 순경 하나가 세모꼴이 된 눈으로 우리를 훑어보더니 금속성으로 꽥 소리를 질렀다. 

“모두 일어서 교복을 벗어서 각자 가방에 넣어. 너희들은 지금부터 종로서로 이송한다. 동작 빨리해.”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청천벽력이었다. 적반하장이었다. 부정선거는 저희들이 저질러놓고 양민과 지성인을 이렇게 코너에 몰아넣을 수 있느냐는 항변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다. 우리는 종로서의 강당에까지 끌려오게 되었다. 강당에는 이미 100여명의 고대학생들이 끌려와 있었다. 그러나 기세는 가두에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내어 교가를 합창했다. 그 소리가 천장을 뚫고 나가 일대에 메아리쳤다.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 / 안암의 언덕에 펴져나는 빛을 보라 /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 드높이 쌓아올린 공든 탑 /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마음의 고향 /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영원히 빛난다

언제나 부르고 듣던 교가였지만, 이 철장 없는 감옥에서 교가는 한결 엄숙하고 존엄하게 들렸다. 가슴이 찡하면서 가벼운 흥분이 피부를 스쳐가는 것이었다. 뒤에 들어온 동지들에게 물으니 고대인의 주력부대는 이미 국회의사당 앞까지 가서 맹렬한 시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철승(李哲承) 의원과 유진오(兪鎭午) 총장이 설득하려 그들을 학교로 되돌아가도록 했다고 한다. 오후 5시경이 되자 유진오 총장께서 우리들을 데리러 오셨다. 경찰서장이 안내하여 오더니 그 경위를 전달하려고 먼저 단상으로 올라갔다. 여기저기에서 학생들의 야유소리가 터졌다. 

“건방지다. 내려와라. 네까짓 게 뭐라고 우리 앞 단상에 오르느냐? 어디 본데없이 총장님이 계신데 무엄하게 단상에 올랐느냐?”

이런 항변과 야유의 봉변에 밀려 경찰서장이 입도 못 떼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유진오 총장께서 근엄한 얼굴로 단상으로 올라가셨다. 그러자 아수라장처럼 들끓던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일시에 정숙해졌다. 경찰서장 때와는 그야말로 천양지판이었다. 평소에도 총장님을 존경하고 받들던 우리는 이와 같은 절대절명의 극한 상황 속에서 뵈니 한결 더 외경스럽고 그 인품이 돋보였다.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데리러 왔습니다. 이제 이만하면 여러분의 진심을 만천하에 극명하게 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상 버티는 것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이므로 슬기로운 우리 고대인이 취할 몸가짐이 아닙니다. 정부 당국에 대해 오늘이 이 문제는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국회의사당 앞 시위는 본교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나와 같이 학교로 돌아갑시다.”

그러고는 앞장을 서셨다. 그러자 학생들은 사슬에 엮인 듯이 누구 하나 빗나가지 않고 묵묵히 총장의 뒤를 따랐다. 참으로 유진오 총장님은 훌륭한 교육자요 그 당시 학생들에게는 우상적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나는 그런 분을 총장님으로 모셨다는 것을 지금도 큰 긍지로 여기고 있다. 

 
  고려대 상대 합격 (23회)
  4.19의거에 참여 (2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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