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의거에 참여 (25회)
  제3장 추풍령 울고 넘은 청운의 뜻

학교로 먼저 돌아온 우리는 시위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삼삼오오 흩어져 각자가 오늘 당한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이때 본관 교실에서 일단의 학생들과 함께 윤천주 교수님의 과거 동경유학시절 일본 학생운동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을 당한 시위대 본대가 도착했다. 얼굴에 유혈이 낭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허리를 못 펴고 우거지상을 한 사람, 머리에 붕대를 감은 사람, 동료의 부축을 받은 사람 등 모두 진이 빠져 패잔병처럼 절뚝거리며 대운동장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종로5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동원된 관제 깡패들에게 쇠파이프로 직싸게 얻어맞았다는 것이었다. 먼저 도착한 학생들은 이 보고와 부상당한 사람들을 보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나오고 우렁찬 구호가 운동장을 흔들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나도 살점이 부들부들 떨려오며 자유당의 단발마가 가증스럽도록 치가 떨렸다. 학생들은 다시 교가를 부르고 교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입씨렌트 체이호 / 카시케시 케시코 / 칼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 칼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 야!

태산이 무너지고 지축이 흔들리는 듯 큰 소리로 교호를 외쳤다. 그러고는 내일을 기약하고 정부 측에서 내어주는 버스에 분승하여 그날은 귀가했다. 이튿날인 4월 19일이 되자 도하의 각 신문은 대문짝만한 활자로 어제 있었던 고대인의 의지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무관의 제왕인 언론이 이렇게 호응해주자 우리는 더더욱 의기가 충천했다. 패잔병이 100만의 원군을 만난 듯 용기가 가슴을 뚫고 치솟았다. 

이날 4월 19일엔 서울 시내의 거의 전 대학생이 하나로 뭉쳐 시위에 가담해 거리로 뛰쳐나갔다. 경천동지의 무서운 힘의 행진이었다. 나도 고대 시위대원과 함께 국회의사당으로 밀물처럼 밀고 나갔다. 그런데 데모 군중이 워낙 많아서 경찰의 저지는 전혀 없었다. 우리는 일사천리로 의사당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우리 앞에는 걸리적 거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그곳에는 헤아릴 수 없는 군중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흰 머리띠를 두른 사람, 피 묻은 셔츠를 벗어 흔드는 사람, 메거폰으로 구호를 선창하는 사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부르는 사람들은 극렬한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은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서울은 이 골목 저 골목을 가나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군중이 노도처럼 밀고 다녔다. 

독재정권 타도! 

4·19! 놀라운 대봉기였다. 권불십년이라더니 이 민중의 아우성으로 어찌 경무대인들 배겨낼 수 있었겠는가! 머리가 삶기면 귀도 익는 법. 

드디어 경무대로 밀고 간 학생 시민들에게 발포해 무고한 우리 학생들이 살상되는 일대 참극이 벌어졌다. 데모는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계속되고 전국에서 일제히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쳐대자 이승만 대통령도 마침내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그 뒤 하와이로 출국해 버렸다.

허정(許政) 과도내각이 들어섰다. 나는 독재정권을 타도했다는 데 대한 무한한 국민적 단결력에 경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깝게도 이번 의거에 희생이 된 여러 영령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이 난리건곤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학교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때 고대에서는 단과대학 학과별로 대의원 선출의 공고가 나붙었다. 여러 학우들이 나에게 대의원 출마를 종용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그것은 당면한 두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학업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시절 학생회 일을 맡아 보았지만 많은 시간이 할애되어야 했기에 학업에 지장이 많아 대학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이미 굳건히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거자금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골의 소를 팔아 오는 등 극성맞고 골이 빈 출마자도 있었다. 나는 그럴 처지가 못 될뿐더러 솔직히 말해 그렇게까지 해서 대의원이 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 4월 18일 월요일 12시 50분 본관 앞에 모인 고대생 3000여 명은 선언문을 읽고 거리로 나아갔다 [출처 ; 고려대 디지탈아카이브]

그러나 학우들의 끈질긴 강권에 부대껴 출마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출마를 해도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첫째로, 돈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회에서 타락선거부정선거를 했기 때문에 4ㆍ19가 터졌는데, 그런 악습을 신성한 캠퍼스 안에서까지 답습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요, 이율배반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거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참모나 운동원을 두게 되면 타락하거나 부정이 개입되기 쉽다고 판단했다. 돈도 돈이지만 공연한 흑백논리나 중상모략으로 다 같은 학우들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하지 않아 낙선이 되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굳이 대의원이 되어야 할 필수 원인이 없었다. 떨어지면 원점으로 되돌아가 학생 본연의 학업제일주의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풍문에 의하면 일부 입후보자들은 물리적인 전략이 천태만상이었다. 혹은 향응을, 야유회를, 조직을 가동하는 등 그 때깔이 가관이었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목이 터지도록 반대하고 규탄한 부정선거타락선거의 추태와 방불한 작태가 신성한 학내에까지 전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일체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입후보 사실을 선거일 하루 전까지도 학우들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성한 학원의 선거가 4.19 이전의 기성사회의 선거와 닮아서는 안 된다는 점과, 나 자신 내심으로 특이한 선거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러나 선거일은 임박했다. 마침내 입후보자들의 정견 발표회 날이 되었다. 한 입후보자에게 허여된 시간은 불과 5분 정도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 학생회 활동을 한 경험과 YMCA 활동에서 배운 경험,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을 총망라해서 정견의 골자를 짰다.

그러나 불과 5분 동안이라 그만큼 힘이 들었다.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말했듯이,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되레 그 준비시간은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불과 몇 마디로 청중을 휘어잡는 촌철살인의 개(慨)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준비와 특이한 화술이 요구되는 법이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등단했다. 그러고는 10초 정도 청중을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소란하던 장내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내가 말을 안 하고 묵묵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리 준비한 제1막이 그대로 적중이 된 셈이다. 청중을 온통 내게로 집중시키기 위해서 이 방법을 미리 고안해 두었던 것이다. 비로소 제1성을 터뜨렸다.

“친애하는 학우 여러분! 나는 유서 깊고 전통이 빛나는 우리 고대인이 된 것을 내 생애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고대인은 왜정 때는 반일투쟁의 선봉을 섰고, 해방 후에는 반공투쟁의 선봉을 섰으며, 얼마 전엔 반독재 투쟁의 선봉을 섰습니다.“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폭죽 터지듯 일제히 터져 나왔다. 여기서 또한 내 제2막도 그대로 적중되었던 것이다. 고대인의 시대별 공적을 찬양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선배는 이처럼 조국과 민족과 우리 대학을 위해 벽돌을 한 장 한 장 꾸준히 쌓아 올렸습니다. 우리 고대는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닙니다. 뜨거운 피와 땀과 노력의 소산입니다. 나를 만약 대의원으로 밀어주신다면, 난 우리 고대와 저 서울상대를 잇는 도로의 포장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명문교 사이가 비가 오면 흙탕길이 되고, 날이 개면 뿌우옇게 먼지 기둥이 서서야 되겠습니까? 이 공사는 반독재 투쟁을 한 고대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들이나 저 창백하고 몸이 약한 서울 상대의 수재들을 위해서 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이 계획을 총학생회에 건의하여 서울시가 이 공사를 하게끔 내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나의 정견 발표가 끝났다. 그런데 내 제3막인 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도 청중을 사로잡았다. 아까보다도 더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무튼 나는 이 정견 발표로 대학 4년간 ‘아스팔트’란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붙어버렸지만, 그때의 정견 발표는 대성공리에 끝났다. 나는 청중들의 반응에 취해 타 후보를 압승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며 투표 결과를 기다렸다. 마침내 투표도 끝나고 당락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물론 나는 예상했던 대로 당선되었다. 

나의 지혜를 총동원한 보람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나는 얼마 동안 기어코 해냈다는 성취감에 취했다. 조그만 촌극이었지만 이런 촌극과 더불어 나의 대학생활은 지겨운 아르바이트로 점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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