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의 상경과 계리사 합격 (26회)
  제3장 추풍령 울고 넘은 청운의 뜻

대학생활도 1, 2학년이 후딱 지나가고 어느덧 3학년이 되었다.

내 생활에 혁명을 가져와야 된다고 생각했다. 대학생활에 확충을 기해 자기성장을 꾀하고, 무언가 남다른 전공(專攻)을 이룩해야 대학인의 사명을 완수한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오로지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마치 내 몸에서 진한 피를 뽑아내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며칠을 두고 생각한 끝에 내 나름대로의 청사진을 들고 부모님과 격의없이 상의하러 고향에 갔다. 세밀하게 계획을 짜서 내려갔지만 감히 입을 열수가 없었다. 족제비도 낮이 있다는데 소작권소송이후 철저하게 망해버린 끝이라 얼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뜻을 세워 이왕 고향까지 내려왔으니 그냥 돌아설 수도 없었다. 

“아버님, 전 초등학교 졸업 후 이내 진학을 못해 다른 사람들보다도 학교 졸업이 2년이나 늦은 셈입니다. 그 2년을 따라잡는 길은 제가 공부에만 열중하여 출세를 남들보다 빨리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가정교사를 하느라 금싸라기 같은 시간을 다 빼앗기고 보니 제 공부를 하는데 지장이 여간 크지 않습니다. 귀중한 시간 다 놓치니 아깝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야 그럴 테지.”
“아버님, 그래서 아버님께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갑자기 내려왔습니다.”

“상의?”
“예, 이건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라 놀라시겠지만, 여기 농토 일부를 팔아서 서울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아닌 밤중에 홍두께 내밀 듯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서울로 가다니?”

딴은 그러했다. 흙을 파먹고 사는 시골사람에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제 친구집 바로 옆에 마침 가게가 하나 나왔는데, 그 집에 세 들어서 세탁소를 내면 여기서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고, 저도 가정교사로 나가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겠습니다.”

“아암, 시작한 공부야 해야지. 아, 넌 우리 집의 장손이며, 예로부터 장부 열여섯이면 호패를 차고, 스무 살이면 관례를 치렀다. 네가 어련히 생각한 일이겠냐만 그 세탁이란.......”

“아버님, 뭐 어려운 것 아닙니다. 세탁은 따로 맡기는 데가 있으니 세탁소에서는 주로 옷을 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 다리는 것은 기술자를 고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서울로 가면 누이동생도 야간이나마 다닐 수 있을 테니 해보실 만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걱정이 되시는지, 내일까지 좀 생각해보자고 하셨다. 이튿날이 되자 아버지는 의외로 반승낙을 해주셨다. 장손인 나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부를 마치게 해야겠다는 굳은 의지의 발로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먼저 서울로 올라오고 아버지와 누이동생은 논 서마지기를 팔아 뒤늦게 올라왔다. 시골집에는 어머니께서 할아버지를 모시며 나머지 동생남매를 데리고 생활하게 되었다. 요새말로 하면 기러기가족이 되고 말았다. 회자정리라지만 가족이기에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서울서 세탁소를 차렸다. 농자지천하지대본인 줄만 알고 선영을 지키며 고향에서 줄곧 살아온 시골사람으로서는 낯설고 인정이 설은 서울살림살이란 모험이라면 일대 모험이었다. 얼떨결에 차린 세탁소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나는 또 시간을 버는 다른 방법 하나를 고안해냈다. 

그것은 내 군대문제였다. 어느 사람은 3년간 꼬박 복무해야 하지만 2년만 복무해도 제대가 될 수 있는 그런 제도가 생겼다. ROTC가 그것이다. 대학 3, 4학년 때 매주 120분짜리 2시간의 군사학을 배우고, 여름방학 때는 한 달동안 예비사단에서 훈련을 받으며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여 월급까지 받으면서 2년간 복무하면 제대가 되는 제도였다. 
 
▲ 고려대 ROTC(학군단) 시절 캠퍼스에서

나는 이 ROTC를 지망하여 들어갔다. 그러면 결손되었던 시간 중 1년은 버는 셈이 되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내 공부를 위해 우리 가족과 나는 그때부터 이른바 총력체제로 돌입하여 비상이 걸렸다. 첫술에 배부를 리 없었지만, 세탁소도 그럭저럭 꾸려나가게 되어 나는 가정교사와 학생회 활동을 그만두고 오로지 계리사(計理士) 준비를 하느라 그때부터 생활의 혁명을 일으켰다. 

우선 대학 서관(西關) 시계탑 밑에 위치한 ‘고시준비반’에 합류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6시에 그곳에 도착하여 하루에 약 15시간씩 공부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미리 도시락 두 개를 싸와서 점심과 저녁을 떼웠다. 가끔 저녁엔 학교 앞 식당에서 국물을 사서 함께 먹으면 그 도시락이 산해진미처럼 맛이 있었다. 

이렇게 피나는 공부를 두세 달 하고보니 능률도 꽤 올랐다. 전력투구가 되기 때문에 진도도 가속이 붙었다. 그 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곳까지 찾아오는 친구들 때문이었다. 나는 학생회 활동을 하는 바람에 친구가 많았다. 그 친구들 모르게 시계탑 밑에 있는 법대고시반에 파묻혔다. 친구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까지 찾아오곤 했다. 

나는 그 친구들이 옆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급기야는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내 공부와 그곳 학생들을 위해선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청량리 <중앙법률연구원>이란 고등고시 준비를 위한 사설도서관을 자리를 옯겼다. 자리가 좀 좁았지만 학생 수도 적고 분위기도 훨씬 조용하고 좋았다. 

나는 거기서 합숙을 하며 시장에 나가 상밥을 사먹었다. 말이 합숙이지 그곳에선 밤샘을 하는 맹렬생이 많았다. 고시합격이란 공통분모를 가진 나도 이들에 질세라 눈을 부릅뜨고 공부를 했지만, 나도 모르게 책을 펴놓은 위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는 것이 그때의 내 수면시간이었다. 잘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니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은 내가 아닌 딴 사람인양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이를 악 물었다. 인생은 화려한 장밋빛 길만이 아니다라는 생각과, 나를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들과, 나를 보살펴주셨던 공군 정훈감실의 어른들과 출판사 유지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스스로의 마음에 채찍을 가했다. 이 각고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외 심은데 외를 딸수 있다. 그해 12월에 제9회 계리사 본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지망생은 많았으나 전국에서 9명밖에 합격이 안 된 어려운 시험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치러온 시험은 연학(硏學)에의 자격 획득을 위한 것이었다. 이 계리사 시험 합격은 내 직업을 보장해주는 자격의 획득이라 그 색깔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제 어떠한 극한 상황에 던져지더라도 빵은 보장되었고, 그 지긋지긋한 궁기도 벗어던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치 돈을 낳는 ‘전생주(錢生珠)’란 보물이라도 얻은 듯했다. 나를 위해 총력체제로 돌입한 부모님과 온 가족 앞에서도 약간의 면목이 섰다. 

더욱이 이 계리사 자격은 ‘오일경조(五日京兆)’같은 껍데기 영화가 아니라 무덤에까지 지고 갈수 있는 식도(食道)의 영원한 보증서이기에 상과대학생들에게는 선망의 목표가 되어왔다. 이 경사가 다 나의 쉼 없는 면학의 소산이라 생각하니 공부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고 학업제일주의의 깃발을 더욱 더 드높이 휘말리게 되었다. 

 
  4.19의거에 참여 (25회)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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