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나팔소리 (30회)
  제4장 청춘의 편린들

내가 고대 상대를 졸업한 것을 1964년의 이른 봄이었다. 한국과 월남 간에 국군파견협정이 체결되던 해이다. 이 협정이 체결되어 우리 국군이 비들기, 맹호, 청룡, 백마부대가 점차적으로 월남에 파견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 2월에 제 2기 ROTC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4월에 군에 입대했다. 26세 때였다. 

군사학 성적을 별로 좋지 않았으나 ‘계리사’ 시험에 합격한 관계로 전국 각 대학에서 39명 정원의 선호도가 높은 경리장교가 되었다. 입대와 동시에 영천(永川)에 있는 경리학교에 입교했다. 이 학교는 3개월 간의 훈련을 받는 초등군사훈련과정이었다. 

그 당시 영천에는 부관학교, 헌병학교, 경리학교가 있었는데, 이 3개 학교가 서로 어느 학교가 더 훈련과 군기가 엄격하느냐로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 경리학교는 군을 유지하는데 핵심이 되는 예산과 돈을 관리하는 경리장교의 양성교여서 훈련이 다른 학교보다도 한껏 엄격했다. 다시, 말해서 전시에 군을 먹여 살리는 돈을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적이 공격하는 최대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었다. 

육사 12기 출신인 이동우 대위가 중대장이었는데, 그는 완전히 육군사관학교식 훈련과 교육을 시킬터이니 각오하라는 식의 위협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지금까지의 학교 교육이 너무 절도 없이 느슨하고 적당주의로 흘렀다며, 그런 사고방식과 태도로는 군의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딴은 그러했다. 지금까지의 학교교육은 군사교육을 단순한 학과로서 다른 학과와 동등한 위치에서 받아왔다. 그러기에 여유가 있고, 훈련도 그런대로 견딜 만 했다. 그러나 경리학교의 훈련은 일선과 직결이 되는 실전교육이라 눈에서 불꽃이 튈 정도로 호되게 죄어쳤다 얼마나 악랄하게 들볶느냐 하면, 점심시간도 그냥 두지 않았다. 

어느 군대에서도 점심 먹고 나면 일정한 휴식시간을 주는 것이 육체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좋다하여 필수의 것인데도 이것마저도 몰수하기가 일쑤였다. 이 시간에 연병장에 집합시켜서 호왈(護曰) ‘걸음걸이’부터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다 큰 사람을, 그것도 어엿하게 육군소위 계급장까지 붙여놓고 걸음마를 가르치다니 실로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연병장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걷게 하고는, 일일이 주의를 시켰다. 

“눈동자가 썩었다. 고개는 바로”“김 소위, 왼쪽 어깨가 쳐졌어.”

“이 소위, 다리가 여덟팔자야. 바로 해. 가슴을 펴고 대함민국 자랑스러운 육군장교답게 씩씩하고 당당하게 걸어.”

그때 우리는 너무 시덥잖아 킬킬대고 웃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자세와 걸음걸이는 그때 분명하게 형성된 것임은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그때 입교하자마자 너무 간절한 나머지, 식사도 제한된 시간 내에 다하지 못했다. 개도 밥을 먹을 때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제한된 시간 내에 다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밥을 먹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이 고된 훈련에서 영양실조가 될까봐서 그 제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채 씹지도 않고 물과  같이 벼락치기로 먹는 바람에 체한 적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행정요원에게 소화제를 구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더 크게 벌어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중대장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노발대발했다. 
 
▲ 군대, 전방에서 근무하던 시절 / 왼쪽에서 3번째가 필자이다

“정신없는 놈들. 흥, 군대에서 소화제를 찾는다구? 뜨거운 맛 좀 봐라.”
 
우리는 몇 시간의 몇 시간의 구보를 하는 기합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파김치가 되어 버렸다. 나는 이때 단체기합이 오로지 나 때문이라는 자격지심으로 다른 사람들보다도 땀을 배로 흘렸다. 

이 육체적인 훈련이외에도 정신훈련도 만만치 않았다. 몇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그때 교내에 자동판매기가 있었는데, 한 달 후에 뚜껑을 열고 결산을 했다. 그런데 이때 땡전 한 푼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큰 난리가 났다. 고대하던 토요일의 황금 같은 외출이 몰수되고, 복도 앞에 크게 써 붙인 ‘명예’라는 글자 앞에 부동자세로 몇 시간을 꼿꼿이 세워두는 기합을 받아야 했다. 

자제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것도 공공연히는 못하고, 돌아앉으면 의논이나 한 듯 일제히 터져 나왔다. n불평불만이라는 것도 기실 별게 아니었다. 농(弄)이 반인 시시껄렁한 것들이었다. 

“중대장이란 게 생긴 꼴이 눈이 웅덩이처럼 움푹 패이고, 비루먹은 당나귀같이 삐쩍 말라서 꼭 원숭이 종자 같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돼먹지 못한 인간이다.”
“육사출신이란 게 원래 틀에 찍힌 인간들이라 융통성이 없는 거 아니냐?”

“아암, 인간적으로 돼먹지 못한 개 뼉다귀다.”
“오늘 퇴근하다가 이 지상에서 영원히 꺼져버려라.”
“맞다, 맞어. 그 보기도 역겨운 얼굴 내일 아침부터 제발 안 보여달라.”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말이 육군소위이지 아직도 꼭지가 떨어진 장교가 아니라 대학생을 벗어나지 못한 피교육자로서 철부지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락시간에 우리들의 비밀은 들통이 나고 말았다. 대체로 오락시간이 되면 오락만이 아니라 그날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중대장이 시뻘건 얼굴로 우리들을 매섭게 다그치는 것이었다. 

“귀관들, 무슨 놈의 불평이 그리도 많은가?”

우리들이 중대장을 흉보고 욕한 내용을 모조리 앵무새처럼 되뇌는 것이었다. 참으로 귀신도 곡하고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분명히 중대장이 없는 곳에서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중대장에게 고해바친 간신이라도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었다. 

“그 따위 사고방식으로 어떻게 지휘관이 될 수 있으며, 병사들의 소중한 생명을 책임 질수 있겠는가? 귀관들, 전원 단독무장하고 연병장에 집합!”

이 난리 통에 즐거운 오락시간은 몰수되었고, 우리들은 강변 자갈밭으로 나가 전원 포복훈련을 받게 되었다. 

아무리 자업자득이라지만, 억세게도 재수 없는 밤이었다. 모두들 여름 반소매였기에 대부분이 양 팔꿈치가 새빨갛게 까지고, 정강이가 찢어 터지는 등 난장판이었다. 

“어느 놈이 고자질을 했을까?”

이것이 우리들의 최대 관심사요, 원망이었지만 아무튼 그날은 모두 만신창이로 녹초가 되어 귀대했다.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 (29회)
  중대장의 군기 (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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