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겪은 삼가 드무실_2 (12회)
  제2장 뼈를 깎는 배움의 뒤안길

이처럼 남들보다 앞선 호기심이 어쩌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그랬다던가. 서녘 하늘에 뻗어나간 능선을 보고, 저 산은 어디에 뿌리를 박고 어디로 뻗어나가는지 호기심을 가졌던 고산자 선생, 마침내 그 호기심으로 저 유명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하지 않았던가. 

나는 어릴 때부터 어줍잖은 자연이나 사상(事象)도 결코 예사로 보지 않았다. 그 이면에 숨은 의미나 원인이나 결과에 무한한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이것은 학문을 할 때에도, 장성해서 인생을 경륜(經綸)할 때에도, 굴절 없는 관찰 다음에는 꼭꼭 그 이면이나 근원에 대해서, 밤을 새며 호기심을 발동시켜 추구해나갔다. 

그 날의 내 호기심이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보지는 못했어도, 단신(單身)으로 불탄 읍내의 참상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때의 내 원색적인 심정을, 나는 오늘 이 시간에도 큰 자랑으로 자부한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은 너무 매정스러웠다. 이사 온지 1년이 되던 우리에게 불행의 명예를 걸어주지 않았던가. 6.25전쟁의 포성이 터졌다. 나는 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우리 학교에서는 모내기철이라 3일간의 가정실습이 내려졌다. 나는 어른들과 함께 새로 산 무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쌕쌕이 비행기 몇 대가 하늘을 뭉개는 굉음을 지르며 날아왔다. 모두 일손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그 소리가 너무도 날카롭고 요란해서 무척 공포감까지 짓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벽촌까지는 정보 전달이 늦은  때라 하루가 지나서야 전쟁이 터졌다는 것을 알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멋모르고 기뻐했다. 학수고대하던 통일이 된다며, 지금 생각하면 쥐뿔이나 안다고 기뻐했던 그때의 일에 쓴웃음이 나오지만, 국민들이 얼마나 통일을 갈구하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인민군이 삼가(三嘉)에 들어온 것은 찌는 듯한 더위가 훅훅 달아오르던 7월 하순경 께였다. 이 무렵부터 미군비행기가 날마다 날아와 콩 볶듯이 폭격을 시작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인민군의 전진부대를 저지하기 위한 공격이었다. 

그날도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하늘을 짜개 가르는 쌕쌕이 배행기편대가 느닷없이 날아오더니 우리 드무실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는 그저 지나가기만 했는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외동의 도로변 집을 향해 따따따 기관총 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했다. 도로변에 집이 있는 우리 가족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피신했다. 

그때 나는 숙모님과 함께 집을 뛰쳐나왔다. 그런데 숙모님은 길 건너 큰집으로 뛰어 들어가고 나는 엉겁결에 내동으로 들어가는 길가 집 담벼락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내 가슴은 물방아처럼 쿵쿵거리고, 아랫도리를 사시나무처럼 후들후들 떨렸다. 난생 처음 겪는 괴변이라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혼쭐이 나면 무심결에 대소변을 싼다더니, 그때 방정맞게도 요기(尿氣)를 느꼈다. 하초가 찡하게 아플 정도로 요기가 가속화하였다. 그 난리통에도 아무데나 함부로 방뇨할 수 없었다. 이 무서운 행동반경 속에서도 학교교육의 효능이 나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사방을 디룩디룩 살펴보다가 그 집 행랑채 바깥에 오줌 구유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뛰어가 방뇨했다. 

그 난리 건곤(乾坤)에서도 배설의 쾌감이 전신의 경색과 공포증까지 시원스럽게 풀어주었다. 그러나 그 쾌감도 잠시였다. 남산을 돌아 나온 쌕쌕이가 다시 폭탄을 퍼부었다. 그러자마자 숙모님이 들어가신 그 큰집이 대단한 먼지기둥을 일으키며 꽝하고 터지더니, 삽시간에 불기둥이 치솟으며 폭삭 내려앉았다. 
 
▲ 한국전쟁 당시 미군 B29(일명 쌕쌕이)의 폭격장면 [미해군 홈페이지]

이 바람에 나는 길옆에 있는 한 길이 넘는 개골창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그 옆 다리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런데 그 다리 밑에는 우리를 위시해서 동네 사람들이 양쪽 벽쪽에 바싹 붙어 앉아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그곳으로 숨어들자 동네사람들은 나 때문에 공격 표적이 이 근처로 집중되었다고 나무랐다. 사지에서 드러난 야박한 인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나 때문에 동넷분들이 죽는 게 아닌가 싶어 너무나 송구한 마음으로 벽가에 붙어 앉지 못하고 다리 한복판에 퍼질러 앉았다. 폭격으로 죽는다면 내가 먼저 죽어야지 하는 심정에서였다. 그러나 젖버듬하게 앉았던 할아버지가 나를 잡아 당겨 꼬옥 껴안아주셨다. 이때 다시 콩볶는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기관총 소사 소리였다. 고막이 터져나갈 듯한 날카로운 금속성이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바뀌었다. 

숙모님의 안위가 염려스러워 조금 전의 폭격상황을 할아버지께 말씀 드렸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시고는 혀를 몇 번 차시며 몹시 초조해하셨다. 이윽고 비행기가 사라지자 나는 숙모님이 은신하신 집에 할아버지를 가보시게 했다. 그러고 나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들판을 건너질러 남산 밑으로 뛰어갔다. 그 넌더리가 나는 비행기가 다시 되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산 밑 바위 쪽으로 가니 그곳에도 이미 피신한 동네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이 내 왼팔을 가리키며 별안간 기암을 하는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보니 내 왼쪽 팔죽지에 유혈이 낭자했다.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고통이 일시에 엄습했다. 

일제 때 해인사 아랫마을에 밤에 큰 불이 났다. 이를 바라본 해인사 스님들이 하도 급해 맨발로 허겁지겁 뛰어 내려가 밤새도록 그 불을 껐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불을 다 끄고 좀 쉬려고 그 중 한 스님이 바위에 걸터앉았는데 갑자기 발바닥이 화닥화닥 하여 내려다보니 못이 발바닥에 박혀 있었다. 불을 끄느라고 정신을 한곳에다 집중하다보니 못이 찔린 고통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을 다 끄고 평온을 되찾아 비로소 그 고통이 시작되었다. 

먼 훗날 어느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이야기를 들려주며 스님은 사람이 정신이라 이처럼 한곳에만 집중하면 무서운 힘을 가지며, 여타의 잡념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했다. 

참으로 백번 음미해도 진한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아마 그날 폭격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다친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어른들이 망개 잎사귀를 떼어와 상처에 붙여 동여매주었다. 그런 후 그 팔을 곰배팔처런 칡넝쿨로 어깨에 걸빵을 걸고, 다시 들을 건너 그 다리 밑으로 갔다. 그때는 다시 폭격의 기미가 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가 뜻밖에도 그곳에서 약을 달이고 계셨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여쭈어보니 작은 어머니의 약이라고 하셨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일말의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다. 어머니께서, 숙모님이 폭격으로 한쪽 다리가 잘리고 화기를 마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었다(곧 사망하였음). 그러시면서 날더러 가회면 한밭에 은신해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인민군 노무동원을 피해 한밭이라는 곳에 피난을 가 계셨다. 그땐 낙동강변에서 전투가 벌어지던 때라 밤마다 인민군을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부락단위로 노무동원을 했었다. 
 
그때 아버지는 인민군 노무동원을 피해 한밭이라는 곳에 피난을 가 계셨다. 그땐 낙동강변에서 전투가 벌어지던 때라 밤마다 인민군을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부락단위로 노무동원을 했었다. 

나는 걸빵을 메고 아버지를 모시러 30리도 더 되는 한밭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내가 10여리쯤 걸어갔을 때였다. ‘그믐재’에서 허겁지겁 뛰어나오는 아버지를 만났다. 다른 사람의 기별로 저간 사실을 다 듣고 몹시 걱정이 되어 부랴부랴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대성통곡을 하셨다. 숙모의 부상도 부상이지만 내가 용케도 생존해 있다는 데 대한 감읍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러했다. 내 팔죽지가 아니라 만일 그 파편이 내 가슴을 때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마 나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이 이 글을 이렇게 쓸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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