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이 망가진 둥지_1 (13회)
  제2장 뼈를 깎는 배움의 뒤안길

우리는 그때 일이 있은 뒤로 가회면 나무실의 이모님 댁으로 한 달가량 피난을 가 있었다. 그런데 지리산 빨치산이 식량조달을 위해 마을로 습격해온 어느 날이었다. 이모님이 날더러 소를 먹이고 오라 하셨다. 인민군으로부터 소를 피신시키려는 의도였으리라. 그래서 소를 몰고 동구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민군이 나타나 따발총부리로 나를 제지했다. 

“동무, 정지! 어디 가는 거야? 소먹이는 척 위장하여 지서로 가 우리를 밀고 하려고 하지?”

그때는 인민군이 낙동강에서 패하여 한참 후퇴를 하고 있는 때였다. 번지수가 도통 맞지 않는 어거지 심문이었다. 나는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그렇지 않다고 했다. 

“오늘 밤에 동사(洞舍)로 나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르쳐 줄게.”
인민군은 멋쩍게 씩 웃더니 나를 놓아주었다.

6.25 전쟁 중에 보여주신 우리 아버지의 살신성인을 이긴 사랑을 나는 지금도 종교처럼 받들고 있다. 

어느 날이었다. 쌕쌕이가 온 산을 쩡쩡 울리며 날아왔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꼬옥 잡고 급히 뒷산으로 피신했다. 나는 숨이 할딱할딱 목으로 차올라 금방이라도 껌뻑껌뻑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 쌕쌕이가 낮게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자 아버지는 우거진 가시덤불 아래로 나를 나꾸어 채가더니 덤불 밑에 엎어놓고 당신이 내 등위에 납작 엎드렸다. 총알을 맞아도 당신이 맞고, 자식만은 살리겠다는 방패박이로 그러셨던 것이다. 

어느 아버지든 그 지경에 이르면 다 그럴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서 70을 넘긴 지금에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자식에 대한 부정(父情)의 숭고함에 옷깃을 여민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서울 용미리 공동묘지에 누워계시지만 길지명당(吉地明堂)에다 유택을 마련해드리지 못한 이 불초는 이 밤에도 청개구리의 옛 전설을 되뇌어 본다. 

그런데 그해 추석을 며칠 앞둔 무렵이었다.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밀려 후퇴를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후방마을에는 인민군과 함께 남하한 정치공작대가 북한의 선전하고, 행정조직을 북한식으로 개편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처음에는 그들이 청산유수로 들려주는 감언이설에 모두 아편 중독차처럼 뺠려 들어갔다고 한다. 인민이 주인이며, 배부르고 행복하고 잘살 지상낙원을 건설하려고 전쟁을 하고 있다고 했단다. 전세가 일시에 밀리기는 해도 부산 해방이 멀지 않다고 떵떵거리며 장담을 했단다. 

그러나 농민들은 얼마 안가서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인민군이 나날이 밀려 도망치는 것도 믿을 수 없었으나, 그보다 더한 일이 이즈음에 일어났다. 논 한마지기에 벼가 몇 포기이며, 벼 한 포기에 벼 이삭이 몇이고, 이삭엔 낟알이 몇 달렸나까지 일일이 조사하게 했다. 소출을 정확히 계산하여 걷어가기 위한 자료로 삼았다. 

이 방법은 벼만 아니라 모든 전작물(田作物), 이를테면 콩이나 깨나 고추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적용했다. 그래서 농민들은 차라리 이럴 바엔 옛날만 못하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런데 그 얼마 뒤인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고, 9월 28일엔 서울을 탈환하여 다시 북진을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6.25를 생각하면 소름이 쫙 끼l고 진저리가 쳐진다. 우리 선조들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는데, 하필이면 동족끼리 총부리를 맞겨누고 싸운 이 6.25의 실상을 지하에 계신 선열들이 얼마나 노여워하실까. 한때나마 우리를 식민지로 다스렸던 저 일본이 이 꼴을 얼마나 비웃었을까 생각해보면 삼국시대 이래 분열을 일삼아온 민족의 비운을 다시 한 번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 한국전쟁 당시 미 전투기의 폭격이 끝나자 주민들이 가재도구라도 건지려고 불타는 집터에 접근하고 있다 (1951.) [사진 출처 ; NARA]

마침내 악몽의 1950년이 지나가고 1951년이 밝았다. 이 해엔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고 38선을 넘어 서울을 침공했다. 그러나 국군이 이를 저지, 서울을 탈환하고, 동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하여 소위 ‘피의 삼각지’에서 싸우던 해다. 악명 높은 저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났으며,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이럴 때 전후해서 내가 다니던 우리 5학년 2반 교실에도 때 아닌 폭풍우가 일어났다. 어느 날 학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때 회장은 읍내 아이였다. 그 회장에 대한 앙알로 나와 두 친구는 그 회의를 방해하느라 작은 여학생 자리에 던졌다. 

그때 6.25전쟁으로 학교 교사가 전소하여 우리는 자갈을 깔고 가마니때기를 깐 가교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 반에서는 나를 위시해서 외토(外吐) 아이와 문송(文松) 아이 세 사람이 성적이 빼어났는데도 회장은 이상하게도 읍내 아이가 했다. 

그러기에 이 회장에 대한 앙금이 마침내 그날 엉뚱하게도 여학생들에게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회장을 향한 정면 공격이 아니라 그가 이끄는 학급회의를 방해하는 측면공격으로 나가자니 이렇게 엉뚱하게도 여학생들이 아닌 밤중에 화를 입은 것이다. 

이처럼 느닷없는 날벼락을 맞자 여학생들이 일시에 높은 금속성을 내며 교실이 떠나갈 듯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회장도 투덜대며 그만 단상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더 이상 속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임마, 회장이 이까짓 시시껄렁한 일가지고 회의를 진행 못해? 네가 무슨 회장이냐?”

나는 회장에게 아귀세게 항거했다 그러자 회장은 입 언저리에 허연 거품을 물고 씩씩 헐떡거리더니 마침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도 질세라 회장을 나꾸어 몇 번 쥐어박고 메쳤다. 이 바람에 회장은 코피가 터졌다. 육덕이 좋고 실팍한 내 주먹의 적수가 아니었다. 

방과 후 하교할 때 시골아이들은 우리들 세 사람에게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냈다. 자기들이 회장에게 가졌던 응어리가 봄눈 녹듯 시원하게 풀렸다며 쾌재를 불렀다. 딴은 그러했다. 그때 읍내 아이들은 산골에서 다니는 아이들을 ‘촌놈’이라고 경멸하면서 골려주었다. 그래서 순진한 시골아이들은 제 풀에 기가 죽어 어깨를 푹 까부라뜨리고 눈을 내려 깔고 다녔다. 그러나 단연코 공부는 산골아이들이 잘했다. 체육시간이면 언제나 그 산골아이들이 지기(志氣)를 폈다. 

그런데 문제는 하굣길에서 일어났다. 나와 우리 일행이 미륵당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데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투가리 깨지는 걸걸한 소리로 불렀다. 

“이놈들 게 섰거라. 내가 단단히 혼을 내어 놓겠다.”
 
서슬이 사뭇 추상같았다. 눈을 까뒤집고 무슨 요절이라도 낼 듯한 그는 아까 우리가 골려준 회장의 아버지였다. 핏기가 얼굴로 쳐 올라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었다. 

“어느 놈이냐? 내 아들을 때린 놈이 어느 놈이냐?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는지 어디 오늘 받은 그 시험지 보자.”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책임추궁이었다. 그런데 마침 회장의 아버지 말마따나 며칠 전에 본 산수시험지를 그날 받았었다. 회장의 아버지는 그걸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회장의 아버지는 회장을 통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온 모양이었다.

 
  6.25 전쟁 겪은 삼가 드무실_2 (12회)
  산산이 망가진 둥지_2 (14회)
  |81||82||83||84||85||86||87||88||8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