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닥친 재앙 (15회)
  제2장 뼈를 깎는 배움의 뒤안길

그즈음 우리 집에는 실로 예기치 않은 재앙이 닥쳐왔다. 우리 식구들 생명의 젖줄인 농토를 두고 뜻밖의 분쟁이 일어났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송지마을에 살 때 가졌던 계단식 40두락(斗落)의 논을 팔아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고는 이곳 장호문이라는 사람의 집과 그의 농토 15두락을 살 수 있었다. 산골짜기 논과 들녘의 옥답은 이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그 15두락 가운데 3두락은 가회면 장대에 있는 이(李)부자의 논이라 소작을 하고 있었다. 소작주가 우리로 바뀌었지만 일정한 도조(賭租)를 내는지라 지주로서는 손익이 없어 그래도 우리가 소작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1년쯤 농사지어 소작료를 냈다. 

그런데 정부에서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을 공포하고, 1950년부터는 농지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개혁법은 소작자의 권익을 옹호하여 현재의 소작인이 그 토지를 원하면 10년 분할상환으로 매입할 수 있도록 한 조치법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선 소작하던 이 부자의 논 3두락을 조치법대로 매입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지주인 이 부자는 완강히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 논은 장호문에게 소작권을 주었으니 우리하고는 아무 연고가 없으므로 새 조치법에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1년간 엄연히 우리가 도조를 바쳤는데도 지주는 마름이 한 짓이지 자기는 숫제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었다. 격분한 아버지는 참다못하여 면(面)농지위원회, 군농지위원회, 도농지위원회에까지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물론 그 결과는 우리의 승소로 판결이 났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 부자는 아랫사람을 시켜 대구고등법원에 항소했다. 참으로 억척스런 어거지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대구고법으로부터 패소통지문이 날아들었다.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재판개정의 통지가 재판일 이후에 당도하여 피고가 불참한 것인데도, 부당하게 궐석재판으로 원고에게 유리하게 일방적으로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아무리 빈자소인(貧者小人)이라지만, 너무 억울하고 불합리한 판결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시요, 사법부가 기강을 바로세우지 못했던 어수선한 때라 그럴 수도 있었다고 이해는 가지만, 당한 것은 약자인 우리 청개구리들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대법원에 항소하려고 했으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송비용도 없으려니와, 소송에 신물이 난다며 완강히 반대하고, 서마지기 농토를 포기자하자고 했다. 아무리 정당해도 약자는 섣불리 시비를 가리다가는 패가망신 당하기 마련이라는 논리였다.          

이 패소로 우리 집안은 움도 싹도 없이 하루아침에 쑥밭이 되고 말았다. 많은 소송비를 무느라 농토는 수증기처럼 증발이 되고, 졸지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농민을 위한 농지개혁 시책은 이처럼 실제 집행과정에서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때 나는 열다섯 살의 홍안(紅顔)의 소년이었지만, 어른들의 말을 듣고 적잖이 분개했으며, 그 가난을 피부로 짓씹었다. 

‘원수를 갚자.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판사나 검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되어 저 사람들의 논을 몽땅 사버리자.’

나는 이를 악물며 장래를 다짐했다. 더더욱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그렇게도 가고 싶던 중학을 갈수가 없었다. 삼순구식(三旬九食)도 어려운 지경에 진학이란 언강생심 먼 나라의 배부른 이야기였다. 
 
▲ 초등학교 졸업 무렵 (왼쪽이 필자이다)

내 결심과 꿈이 이 소송으로 수포가 된다고 생각하니 실로 감내하기 어려운 정신적 충격이 몹시 나를 괴롭혔다 .나는 지금도 철저하게 망해버린 그때의 우리 집안을 잊을 길이 없다. ‘소돔, 고모라’ 시(市)에 내린 유황불비가 이보다 더했으랴? 폭군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을 때, 시민들의 비참이 이보다 더했으랴?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1953년은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반공포로 27,000명이 6월 18일에 석방이 되던 해였다. 이보다 앞서 2월 15일에는 ‘긴급통화조치령’이 발표되어 우리 돈 ‘원(圓)’이 ‘환(圜)’으로 바뀌는 통화개혁이 있었다. 

소송패배로 우리는 조반석죽(朝飯石粥)으로 근근이 연명을 하고 있었다. 여기다가 통화까지 개혁되어 우리는 땡전 한 푼 구경할 수 없었다. 식구들은 일 년 열두 달 고기 한 칼 못 얻어먹어 비린 것에 주려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들어앉아 구천이처럼 절치부심 섶에 자고 쓸개를 씹는 와신상담의 결의를 단단히 굳혔다.      

중학 강의록을 받아 독학을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산밭골 재실(齋室)에서 권언부 선생님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 때건 집안 형편이 풀리면 이 좌초에서 벗어나 도시로 나가 진학을 할 작정이었다. 

그때 <명심보감>을 배웠다. 매일 서너 줄씩 배우면 종일토록 그것을 암송하고, 몇 번이고 써 익히는 단순반복의 학습이었다. 나는 자랑이 아니라 선생이 두 번 가르치지 않아도 이를 잘 소화했다. 진도가 다른 학동들보다 빨라서 혹 선생이 볼일이 있어서 별강을 할 때는 내가 늘 선생대신 대강(代講)을 했다. 

그때 권 선생님은 새벽에 첫닭이 울면 벌써 일어나 재실 대청마루를 거닐면서 큰 소리로 글을 외곤 하셨다. 그 소리가 아주 크고 청아해서 우리는 몰론 동민도 다 깨어 일어났다. 다른 아이들은 농사짓느라 일어나기가 고되다 하였지만 나는 선생의 글 외는 소리를 들으면 오뚜기처럼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껏 소리를 내어 따라 읽었다. 

다른 아이들은 잠이 모자라 꿈뻑꿈뻑 졸면서 글을 외다보니 잠이 들수록 그 외는 소리마저 차차 잦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흔들어 깨워준 일이 지금도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 

그때의 학습방법은 주로 암송하는 것이었다. 현대교육은 주입식이나 암기교육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이 암기교육이 큰 효과를 가져다 준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때 배웠던 명심보감의 몇 페이지에 무슨 글이 실려 있다는 것까지도 다 알 수 있다. 그래서 요즘도 나는 곧잘 글을 쓸 때나 대화에서 그 유명한 글들을 인용해 쓰곤 한다. 
 
나는 이 순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의 일화가 생각난다. 드골 대통령이 최고 사령관인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기자회견을 할 때다. 기자들이 까다로운 질문을 하면 드골은 먼저 프랑스의 명시(名詩)를 눈을 감고 암송을 했단다. 그러면 기자들은 기가 죽어 더 이상 까다로운 질문을 못하고 어물쩍 넘어가거나 어쩌면 그렇게도 명시를 잘 외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릴 때 우리 어머님이 늘 명시를 골라주면서 외게 하셨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교실 벽에 프랑스의 명시를 많이 써 붙여 놓고 그걸 외라고 하셨어요. 그때엔 그 뜻을 잘 몰랐지만 열심히 외었지요. 그러나 차차 성장하면서 그 시를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요즘도 마음이 흥분되거나 당황할 땐 그 명시를 암송하지요. 그러면 대체로 마음이 진정되거든요.”

이 대답에 기자들은 진한 박수와 찬사를 드골에게 보냈다.
 
그렇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물론 수학이나 과학 같은 것은 수리적인 학과이므로 암기가 부적당하다. 그러나 어학이나 인문사회 과목은 이 암기교육을 무조건 배제하거나 타기(唾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 ‘국어’를 ‘국어강독’이라고도 하는데, 이 ‘강독’이란 말을 음미하면 ‘강’은 ‘암송’과 직결된다. 옛날 훈장이 ‘강(講)을 받는다’란 말도 배운 것을 암송하고 해석하도록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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