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무친한 서울 (17회)
  제3장 추풍령 울고 넘은 청운의 뜻

나는 혈혈단신 쬐끄만 옷 보퉁이와 강의록을 사들고 한양 천릿길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고생의 문이 훤히 열린 고학의 길을 어찌 그 어린 나이에 겁도 없이 그렇게 택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아버님, 어머님. 꼭 성공하여 우리 논을 도로 찾아내겠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꼭 갚겠습니다.”

소년답지 않은 하직인사를 드렸다. 1954년 11월 15일, 내 나이 16세 되던 어느 초겨울 날이었다. 그 해는 5월 20일에 제3대 민의원 선거가 있었고, 11월 29일엔 저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되던 해였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른 새벽녘에 사립문을 나섰다. 몇 번이고 문간에 서서 우시던 어머니를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리 집과 남산의 사들을 번갈아보며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난생 처음으로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 화물차는 더러 타보았으나 버스는 생후 처음 타보는 경험이었다. 그날 큰 기약 없이 떠나보내는 부모님의 심경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대구로 나와 서울행 버스를 탔다. 물론 기차도 처음 보았으며 처음 탔다. 차창을 내다보니 땅거미가 지고 산길에서 농부들이 하나둘씩 나뭇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내 두 눈에서 왈칵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소송으로 재산을 날리고 어린 자식까지 멀리 떠나보낸 아버지의 모습이 그 농부에 투사되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차는 나와는 아랑곳없이 북으로 북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기차도 숨이 찬지 헐떡거리며 천천히 달리기에 옆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이 추풍령이라고 했다. 

‘아, 내 고향 경상도야 잘 있거라.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이 불효자식은 동학에 가담하여 전사하신 할아버지의 손자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고생이 닥치더라로 이를 꽉 물고 성공하여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눈물은 흘러내렸다. 잡지에서 본 석월성(釋月性)의 시를 마음속으로 외며 한 밤중에 울며 추풍령을 넘었다.      

사나이 뜻 세워 고향 나서며  男兒立志出鄕關
뜻 못 이루면 죽어도 아니 돌아오리라.  學若不成死不還
뼈 묻을 곳 어찌 선영뿐이랴!  埋骨豈期墳墓地
세상 여기저기 청산인것을.  人間到處有靑山

이튿날 아침 10시경에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닿았다. 서울역은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누구 하나 반겨 마중 나온 사람도 없어 한없이 고독감을 짓씹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집에서 미리 적어준 주소대로 <학생계>사를 먼저 찾아 나섰다. <학생계>나 <학원>을 출판하는 잡지사의 찾아가면 사환이나 일자리 하나쯤은 능히 주선해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서울역에서 차도를 내려 건너  남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우측 붉은 벽돌집에 걸린 <학생계>란 작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나는 지옥에서 보살을 만난 듯했다. 그러나 사무실로 들어가 보니 <학생계>는 11월부터 이미 폐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쟁 통에 수지가 맞지 않아 부득이 문을 닫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판국인데 내가 그것도 시골뜨기가 구직을 한다는 것은 돌 법이나 한 일인가. 그러나 나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도 희망을 걸 수 있는 <학원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와 이번에는 양동에 있다는 <학원>사를 찾기로 했다. 
 
▲ 1954년의 서울역
 
이것은 고향을 떠날 때 미리 짜온 제2의 계획이었다. 양동에 들어서니 어째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식상할 정도로 원색 빨래가 볼품사납게 주렁주렁 널려 있었다. 그곳이 사창가라는 것은 훨씬 뒤에 알았다. 

주소를 들고 행인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런데 내가 목표로 한 <학원>사는 남대문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큰길 아랫편에 있는 조그만 2층집이었다. 아래층은 살림집과 영업부가 있고 2층은 편집실이었다. 
 
나는 그 초라한 사옥을 처음 보았을 때 아무리 전쟁을 치른 뒤라 하지만 그렇게도 훌륭하고 좋은 잡지를 내는 출판사가 이렇게도 초라하고 작을 수가 있을까 하고 실망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 다짜고짜로 김익달(金益達) 사장을 찾았다. 사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았다. 

검정 베 양복에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모표도 없는 검은 학생모를 썼으며, 팔에는 때곱재기가 묻은 보퉁이를 든 꾀죄죄한 떠꺼머리 총각이 당돌하게 사장 면회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의 내 무뚝뚝한 말투나 몰골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가관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원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면회의 사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나는 숫기 좋게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안쪽에서 얼굴이 동글동글하며 키가 작은 중년신사 한분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바로 김익달이다. 어디서 왔노?”

나는 그 말씨를 듣자 와락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기차가 추풍령을 넘을 때부터 승객들의 말씨가 고향 말씨와 달랐는데, 이 <학원>사에 와서 그것도 사장 입으로부터 뜻밖에도 고향의 구수한 사투리를 들은 것이다. “객지에서는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라면 검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그때의 내 심정은 꼭 그러했다. 

나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코가 땅에 닿도록 정중히 인사부터 올렸다. 그리고 미리 생각해두었던 나의 포부와 청운의 뜻을 아뢰었다. 

“아뿔싸, 이 일을 어짜노. 취직이 그리 쉬운 줄 아나. 마, 전쟁 때문에 다 망했는기라. 이 폐허에 일자리가 어딨노, 하모. 니 장한 뜻을 알겠다마는 서울이 어떤데고. 거리나 골목에는 깡패도 우글거린데이. 그런 애들한테 물들면 어쩔라카노. 내가 중학강의록 구해서 무료로 보내줄게. 여비 마련해줄테니 도로 고향으로 내려가거라. 시골 부모 밑에서 주경야독으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기다.”

그러면서 사장은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돈을 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목구멍으로 부글부글 끓는 분노가 다발이 되어 궁글러 올라왔다. 투가리 깨지는 퉁명한 소리로 사장에게 항변했다. 

“사장님, 와 이라십니까? 제가 뭐 돈이나 뜯어갈라고 찾아온 줄 아십니까? 그런 돈 필요없습니다.”

나는 돈을 훽 뿌리치고 선불맞은 노루처럼 사무실을 휑하니 뛰어나왔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개운찮은 수모를 당한 듯한 분노가 머릿속에서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천하를 들었다 놓았다 하던 항우가 해아(垓下)의 마지막 싸움에서 그 천하를 잃었을 때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충무공이 노량진 앞바다에서 적의 화살을 맞았을 때가 이러했을까?
 
이때였다. <학원>사의 사환인듯한 소년이 황급히 뛰어나와 나를 다시 사무실로 데려갔다. 나는 완강히 뿌리치지 못했다. 그것은 혹시 사장이 마음을 고쳐먹고 나를 써줄지 모른다는 한가닥 가느다란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순진한 나의 희망사항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사장은 기어코 내 호주머니에다가 아까의 그 돈봉투를 쑤셔 넣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의 조그만 성의니까 그것만은 저버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나도 그 이상 거절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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