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인쇄소 연락실 근무와 폐결핵 (20회)
  제3장 추풍령 울고 넘은 청운의 뜻

몇 달 뒤 그 악마의 계곡을 뛰쳐나와 서소문 법원근처 판자촌으로 하숙을 옮기고 말았다. 역시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으나 학생들만 하숙치는 비교적 조용한 집이었다. 한 방에서 두세 명의 학생이 합숙했다. 비록 방이 불결하고 이가 우글거렸지만 그래도 학생들이라 공부하는 분위기는 그런대로 좋았다. 

몇 달 뒤 이집 하숙생 중에 이단자 한명이 나타났다. 나이가 24~5세 되는 청년이었다. 처음엔 대학생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언제나 알록달록한 셔츠를 입고 다니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멋을 부리는 청년이었다. 그 청년이 어느 날 나에게 실로 끔찍한 제의를 했다. 

“판제야, 어때? 좋은 수가 있어. 한탕 치면 꽤 돈벌이가 된다고. 있잖아. 다방 같은데 돌아다니며 온갖 생필품을 파는 고학하는 아이들이 있지? 내가 다방 앞에서 그 아이들을 덮쳐서 그 상자를 빼앗아 줄 테니 네가 그걸 받아가지고 내빼란 말이야. 어때? 할 생각 없어?”

실로 기절초풍을 할 제의였다. 아무리 세상이 막가도 도천(盜川)의 물을 마시지 말랬는데, 이거야 말로 백주의 날강도 짓이 아닌가. 나는 불쾌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능구렁이가 몇 마리가 들어앉아 있는 그런 사람과 한 지붕 아래에서 기거하는 사실부터도 부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하숙집도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즈음이었다. 남산 야간중학교가 그 근처 계곡에다 천막으로지만 2층으로 개축을 하여 기숙사로 사용했다. 그때 한양대 학생인 임화섭 선생이 수학을 가르치며 특혜로 그 기숙사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선생이 학업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한 재학생 한 사람을 뽑아 한 방에 함께 기숙하려는데 다행히 나를 선정해주었다. 

나는 참으로 천우신조요 조상님들의 음덕이라 여기고 서소문 그 하숙집에서 용감하게 나와 그곳으로 거처를 옯겼다. 이렇게 철새처럼 몇 군데를 전전하면서도 수업이 될 만한 장사를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생활에 자신이 붙어 오뚝이처럼 넘어지지 않고 일어서는 생활의 철학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2때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우연히 고향 한 동네에 살던 공군중사 노기준을 만났다. 서로 뜻밖이요, 반가워서 한참이나 길에서 부여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다가 근처 다방으로 함께 갔다. 

그곳에서 나는 지나온 상경일지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에게 들려주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노기준은 지금의 퇴계로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퍼시픽호텔 자리의 공군 정훈감실 사진반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신문의 특종감이 될 만한 말을 덧붙였다. 

“판제야. 그 정훈감실 안에 공군 인쇄소 연락사무소가 있어. 그 사무소엔 함경도에서 온 이원상이란 문관 1명이 있는데, 마침 사환을 구한댔어. 어때? 거기에 말해줄까?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보다야 훨씬 나을거야.”

나는 동향인 귀인을 또 만났다. 내가 웅비할 수 있는 기틀이 앞서 말한 방첩대원 수 사람의 해후로 이룩되었다. 

나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싹수머리 노란 지금의 일보다야 어느 모로 보나 희망이 기대되는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잠은 사무실에서 자고 밥은 병사들과 함께 공식(空食)을 하게 된다고 하니, 생활의 기본요건이 해결되므로 정승판서가 부럽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다. 
 
▲ 중학시절 친구들과 / 뒷줄 가운데가 필자

노기준의 따뜻한 배려로 바로 이튿날부터 공군인쇄소 연락사무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일이라야 주로 활자 구입을 하러 주자소(鑄字所)에 가거나 인쇄 재료를 구입해오는 심부름이었다. 공군인쇄소가 양평동에 있었기에 거기서 나오는 교정지를 여기로 하루에 한 번씩 짚차나 쓰리쿼터 편으로 가져오면 이것을 각 출판사로 연결해주는 일도 하게 되었다. 

전쟁 끝이라 서울 시내의 민간 인쇄소는 시설이 부족하거나 미비해서 공군인쇄소가 가장 시설이 잘 갖추어진 인쇄소였다. 동아출판사나 민중서관이나 을유문화사 등 굵직굵직한 출판사가 그들 소유의 일부를 이 공군인쇄소에서 인쇄했다. 그 인쇄소에서 나오는 교정지를 우리 사무실에 놓아두면 그 출판사는 그것을 가져가 교정을 보았다. 말하자면 이름 그대로 이런 일을 중간에서 일보아 주는 연락사무소였다.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나는 출판사 사장이나 저자 등 저명인사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월급보다도 더 큰 소득은 출판업계의 유명인사나 지식인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다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이 시기에 다지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책력을 찍어내던 남산당 권기주(勸基周) 사장의 자상한 사랑을 한껏 받았다. 권 사장은 내가 필요로 하는 교재나 서책들을 구해다주셨다. 그밖에도 눈물겹도록 나를 돌보아주고 사랑해주셨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더니, 내가 지기(志氣)를 펼만하게 되자 내게 무서운 병마가 범접했다. 나는 오후만 되면 미열이 나고, 몸이 마치 누구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나른하고 밤에는 섬쩍지근한 허한(虛汗)도 흘렀다. 내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져갔다. 

내 이 꺼칠한 얼굴을 찰색(察色)한 권 사장은 마침내 중구보건소롤 나를 강제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진찰결과는 내게 가공할 청천벽력을 내렸다. 

결핵초기!

나는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엄청난 날벼락이었다. 여지껏 병원 신세를 지지 않은 건강체였다. 아니 아파도 병원이 멀고 집안도 구차해서 조약으로 그냥저냥 버텨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 폐결핵이 아니라 그보다도 더한 중병이 걸림직했다. 돌에 금이 갈 정도로 추운 엄동설한에도 삼척 냉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영양은 고사하고 끼니조차 거르기 일쑤였던 나에게 무슨 병인들 달려들지 않았겠는가! 

실로 그때의 내 고생은 필설난진(筆舌難盡)의 극한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막힐 지경이었다. 보건소에서 주는 ‘파스’란 약을 가져와 먹었다. 그러나 이 약은 일종의 극약이어서, 속을 훑어 죽을 지경이었다. 

요즘에는 결핵에 좋은 약이 많이 나왔지만 ‘다이어찐’이 만병통치약이었던 때라 ‘파스’가 유일무이한 결핵약이었다. 워낙 평소에 약을 먹지 않아서 인지 약효가 두드러져 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권기주 사장과 이원상 문관은 그게 아니었다. 봄방학도 나가오니 고향으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고 안정을 취하라고 권유했다. 

나는 솔직히 병보다도 모처럼 얻은 직장이 떨어질 까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들의 강권에 못 이겨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두 분이 결코 나를 해롭게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남도행 기차를 타고 말았다. 

고향으로 와 부모님들에게 실토를 하고 동민들에게는 일체 비밀에 부쳤다. 그것은 동민들이 나를 어린 영웅이나 된 것처럼 자랑스레 여기던 때라 그분들에게 뜻밖의 실망을 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향의 삼가읍에 있는 병원에 다니며 주사를 맞고 절대 안정을 취했다. 

내 평생에 대체로 10년 간격으로 불길한 삼재수가 들었는데, 이 시기가 그 두 번째에 해당하는 셈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방학 중이라 학업에는 큰 지장이 없었으나 직장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병은 차도가 현저하게 드러났다. 공기가 맑은데다가 주사를 맞으며 안정을 취하니 몰라보게 건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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