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상고 진학 (21회)
  제3장 추풍령 울고 넘은 청운의 뜻

나는 20여일 만에 다시 상경기차에 올라탔다. 지나온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차창에 어려 오며눈부리가 찡해왔다. 지옥 같은 고생길을 자원해서 택했는데, 그 열매도 맺기 전에 병마에 시달려야 했고, 동민들이 영웅시 하고 있는데도 금의환향을 하지 못한 자신이 철저하게도 영락(零落)된 열등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서울에 도착하니 직장에 대한 내 예감은 한갓 기우였고, 반가운 얼굴들이 나를 따뜻이 맞아주었다. 나는 그 인정의 따뜻함에 취해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보건소 약을 계속 받아다가 꾸준히 복용했다. 2,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보건소에서 다시 X-레이 사진을 찍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어군데 좁쌀만한 검은 반점이 있었지만 그것은 진행성이 멎은, 얇은 자국이라고 했다. 깨끗이 치유되었으니 활동에도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기쁨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신체발부를 부모로부터 받았는데, 그것이 일시적인 발병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았다니, 부모님께도 이제 면목이 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를 움직이려면 먼저 나 자신이 건강해야 하는데, 그 건강을 회복했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건강을 되찾은 뒤로 나는 사무소를 위해 더 부지런히 일했고, 내 성숙을 위해 공부에도 열중했다.        

어느덧 중학 3학년 2학기가 되었다. 나는 이때 진학문제를 놓고 밤마다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야간고등학교인 덕수상고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때 이 덕수상고에만 들어가 졸업하면 은행지점장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 하여 모두들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수험자격이 없었다. 내가 다니던 직업소년학교는 문교부 인정의 학교가 아닌 사설 야간중학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무소에 드나드는 저명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이 애절한 고충을 이야기하고 애원했다. 보람이 있어 장안중학교 3학년에 편입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야간중학은 간단한 학력테스트만 통과되면 수월하게 편입이 되던 때이다.

불과 졸업을 2, 3개월 앞둔 때라 떳떳한 중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2년간의 직업소년학교 시절의 피나는 각고면려(刻苦勉勵)가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는 데 스스로도 감격하였다. 만약 그 동안의 주근야독(晝勤夜讀)의 끈질긴 노력이 없었던들, 어찌 이 오늘의 광영이 찾아 왔으랴 하고 자위했다.

내 공부는 한껏 불이 붙기 시작했다. 덕수상고 입시를 위해 2, 3개월 동안 거의 밤샘을 했다. 잠이 억수로 퍼붓는 새벽녘이 되면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지금도 어머님은 나를 위해 치성을 드리고 계시겠지!’

그때 어머니는 내가 상경 이후 매일 새벽 3,4시에 일어나 내동(內洞) 전씨(全氏) 재실 옆에 있는 약수를 길어다 정화수로 하여 치성을 드렸다고 하셨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면 남산 바위 밑으로 가셔서 삭망 치성을 드리셨단다.

이즈음 내 마음 기둥을 굳건히 잡아준 고마운 사람이 있었다. 한글학자이며 우리 사무소에 자주 오시는 최운걸(崔雲杰) 선생님이었다. 최 선생님은 일본의 지성인 내촌감삼(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분이었다. 교회의 타락과 종교인의 타락에 반기를 들고 교회 아닌 각종 직장 사무실이나 일터에서 기도하고 설교하는 교인이었다. 

최 선생님의 설교에 심취되어 흔들리기 쉬운 마음의 기둥을 꽉 붙잡아 세우고는 수험준비에 박차를 가하여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세월은 살같이 흘러 덕수상고 입시날이 왔고, 마침내 합격자의 방에 ‘박판제’란 이름과 수험번호가 붙었다.
 
▲ 중학졸업기념사진 / 둘째줄 오른쪽에서 4번째가 필자이다

발표장에서 내 이름을 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기어이 해내고야 만 내 의지가 한량없이 자랑스러웠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조부모님의 핏줄을 소리 높여 자랑하고 싶었다. 내 주위에서 나를 보살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했다.

사무소로 돌아와 이 낭보를 전하자 당시 공군인쇄소 소장 최지수(崔枝洙) 중령을 위시해서 최병진 소령, 박기연 대위, 이원상, 조동면 문관, 그 밖의 모든 분이 나를 “박판제 지점장님”이라 치켜세우며 기뻐했다. 아, 운명의 여신은 내 인생사전 속에 오늘의 광영과 행운을 미리 마련해 놓고, 내게 지금까지의 그 따가운 시련을 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1957년 나는 마음과 생활의 안존을 가져왔다. 몽매에도 그리던 덕수상고에 입학했으며, 내 직장 월급으로도 끼니를 거르지 않게 되어서였다.

솔로몬의 영화가 부럽지 않았으며, 진시황의 아방궁이 부럽지 않았다. 천하가 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고, 만유(萬有)가 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형산(荊山)의 옥(玉)을 얻은 듯, 킴벌리의 다이아몬드를 얻은 듯 마음이 가멸고 뿌듯함을 주체하지 못했다.

주위의 시선도 돌에 금이 가는 겨울바람이 아니라 꽃망울을 터뜨리는 따스한 봄바람이었다. 그저 대견하고 장하다는 찬사가 우박처럼 후두둑 쏟아졌다. 동시에 나를 대하는 어른들의 손길이 온실처럼 훗훗했다.

그 당시 상고 야간부의 명문은 덕수상고였다. 그 명문교에 입학했으니, 촌음을 아껴서 공부에 열중했다. 도연명의 권학시(勸學詩)를 좌우명으로 삼고

한창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고  盛年不重來
아침은 하루에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一日難再晨
때가 되면 마땅히 배움에 힘써야 할지니,  及時當勉勵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음이라.  歲月不待人

그렇다! ‘만조청자귀(滿朝靑紫貴) 개시독서인(皆是讀書人)’, 온 조정의 공경 대부가 모두 책을 읽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책을 읽지 않는 자가 어찌 민족을 이끄는 지휘봉을 잡을 수 있으랴. 조국을 몰고 가는 깃발을 잡을 수 있으랴. 

공부만 전력투구 못 하는 내 신세가 안타깝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낮에는 내 의식주의 근원이 되는 공군인쇄소 연락사무소의 일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그런데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풀이 난다더니, 내가 맡은 일에도 이골이 났다. 인쇄 자재인 용지나 활자, 인쇄 잉크의 구입 조달에도 능소능대했고, 고객들에게 교정지의 메신저 노릇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이즈음 연락사무소의 책임자인 이원상 문관이 그만두게 되어 내가 사무소의 일을 혼자서 도맡게 되었다. 연락소장 겸 사환이었다. 한껏 바빴으므로 만전을 기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오고 가는 시간까지 절약해서 공부하기 위해 계속 사무소에서 잠을 잤다. 학교 공부에 열중하는 한편, 학생회 활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방문하여 봉사활동도 충실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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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MCA활동과 진로에 대한 고민 (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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