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꿈 (9회)
  제2장 배움과 사회복지에 눈을 뜬 시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꿈꾸다

나는 홍언교회 백응찬 목사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지역민들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 당시는 농촌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목사가 하나님 다음으로 좋게 보였다 또 공장에 다니면서 먹고살기 힘들어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사회복지에 관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사회선교보다는 사회복지에 더 관심을 두다보니 정치투쟁이나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주로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이나 사회복지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다. 

당시에 사회복지에서 이름 높았던 중앙신학교(현 강남대)를 비롯해 서울여대, 이화여대, 감신대, 중앙대, 한신대 등 전국 17개 대학의 기족학생들이 모여 봉사활동을 하는 모임이 있었다. ‘한국기독학생사회사업연합회’가 바로 그것인데, 나는 이 모임에 속해 활동했다. 우리는 중앙신학교 교수인 김덕준 목사의 지도로 사회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과 행동을 교육받았다. 

연합회에서 활동하던 나는 한신대 대표이자 전체 조직의 회장을 맡게 됐다. 지금까지 만나고 있는 최성균은 중앙신학교 대표였는데, 나와는 손발이 잘 맞았다. 나는 조직을 이끌어가면서 가치가 있는 일에는 주변과 타협하지 않고 끈기 있게 실천하는 편이었고, 최성균은 이견을 조율하거나 합의해 나가는 융통성이 있었다. 연합회는 회원 수만 해도 200명 가까이 되고, 행사 때마다 참석률도 100%에 가까울 정도로 결속력이 대단했다. 

나는 예수처럼 사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연합회는 이러한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조직이었고, 그 일을 실천할 수 있는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연합회에서 한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름방학 때 농촌지역에 가서 워크캠프(work camp)르 진행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겨울방학 때 재건대에서 넝마주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었다. 

워크캠프에서는 농사일을 돕거나 수리가 필요한 낡은 집을 보수해 주는 등 마을 곳곳에 필요한 일손을 제공했다. 또 의료봉사도 했다. 

한편 명동 1번지에 있던 재건대 집합소에서는 넝마주이들과 같이 지내면서 넝마를 함께 주우러 다니거나 그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 넝마주이들은 원래 개별적으로 일을 했는데, 1962년 박정희 정부에서 그들을 관리한다는 목적으로 관할 시청에 등록시키고 증명서를 발급해주었다. 그에 따라 넝마주이들은 지정된 복장을 입고, 명찰을 달아야 했으며, 지정된 곳에서 활동해야 했다. 

등록된 넝마주이들은 <근로재건대>라 불렀으며, 관할 경찰서에서 관리했다. 시민들은 넝마주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나 무서운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였다. 우리는 넝마주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고, 일반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당시 연합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사람으로는 최성균(현 미래복지경영 회장)을 비롯해 김인환(전 LA 한인청소년 연합회 이사장), 양윤(목사), 변도윤(전 여성부장관)이 생각난다. 그때 만난 사람들을 지금도 가끔씩 만나고 있다. 
 
▲ 한신대 학생 시절 / 한국기독학생사회사업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한신대에서 만난 교수들 

학교 다닐 때 나는 신학 공부를 게을리 했다. 한신대에서 기독교 교육을 가르치던 문동환 교수는 준목고시 시험을 볼 때 나에게 0점을 주었다. 문 교수의 강의는 다 좋아서, 열심히 들었는데, 수업 중에 특히 의미 있게 들은 말은 ‘자아확립’이다. 

1962년 군사정부가 내린 정년제에 의해 학장을 사임한 김재준 목사는 명예교수로 강의를 맡았다. 그는 성서신학을 강의했는데, 참 재미있게 강의를 했다. 강의시간에도 사회에 대한 관심은 빠지지 않았다. 김재준 목사는 황성국 교수의 주선으로 우리 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 

그 외 좋은 분들이 많이 계셨다. 문익환 목사는 시인이라 그런지 특유의 낭만이 있었다. 전경연 교수의 꼬장꼬장한 모습도 기억난다. 한신대 전체 학생 수가 대학원생을 포함해서 200명 정도가 되었는데, 학생 교수 모두 할 것 없이 기숙사에서 생활을 한 덕분에 서로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독일에서 공부한 정하은 교수는 윤리학을 강의했다. 졸업할 무렵 판자촌이 있는 가난한 지역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을 들은 정 교수는 박형규 목사를 찾아가 보라고 권유했다. 그때 박형규 목사는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도시선교위원회의 위원장이자 대한기독교서회의 <기독교사상> 편집주간을 맡고 있었다. 

나는 종로 2가에 있는 대한기독교서회 사무실로 박 목사를 찾아갔다. 박 목사는 처음 보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자 박 목사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주민조직에 관한 훈련을 하는 곳을 소개해주었다. 그의 추천으로 찾아간 곳이 바로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였다. 

나중에 안병무 박사도 강의를 하러 왔는데, 서로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매우 가깝게 지냈다. 내가 학비마련을 위해 집을 자주 사고팔고 하자 안 박사는 졸업할 무렵 나에게 “복덕방이나 하지 왜 교회를 하려고 그러느냐?”라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안 박사도 나처럼 자주 집을 사고팔았다. 

나는 훗날 빈민운동을 할 때 프로그램의 강연자로 안 박사를 초청하기도 했다. 당시 강연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판자촌 주민조직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빈민운동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감시를 받아 자유롭게 운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 박사를 초청한 강연은 주로 성경공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마련되곤 했다. 

억압받고 감시받던 시절이라 우리는 그들보다 한 걸음이라도 앞서가는 전략을 짜야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우리의 전략은 그들보다 앞섰다. 아무리 밟혀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 한 풀은 다시 일어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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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과 기관원 (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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