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처였던 형님_1 (3회)
  제1장 가족이라는 울타리

나는 1941년 1월 16일 충남 부역둔 옥산면 홍연리 108번지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둘째 아들인 나는 위로 오목, 영희, 오순 누님과 오식형님, 그리고 여동생 오열이 있다. 이 중 셋은 세상을 떠났고 오순과 나, 여동생 오열만 남았다. 

오식 형님은 하나뿐인 형님이기도 하지만, 내 삶에 커다란 나무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형님의 영향과 도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 형님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가족을 챙기는데 온 힘을 쏟았는데, 특히 나를 귀여워해 힘든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어릴 적 우리 형제는 겨울이 되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서 옥산군 사무소 앞에서 팔곤 했다. 겨울산을 헤치며 쓸 만한 나무토막을 줍거나 녹슨 톱으로 나뭇가지를 자르는 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추위에 동동 떨면서도 우리는 온 산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주로 형님 뒤를 따라다니며 작은 나뭇가지를 주웠고, 힘든 일은 언제나 형님이 도맡아 했다. 장에 팔 만큼 나무가 모이면 칡줄기를 끊어 나뭇단을 만드는데 형님은 늘 무거운 나뭇단을 짋어지고, 나는 가벼운 나무 짐만 지고 내려왔다. 철없던 나는 나무 짐을 옥산면 사무소 앞에 부려놓고 와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면 형님이 끝까지 남아서 그 나무를 다 팔았다. 팔리지 않는 나무는 주로 작은아버지 집에 팔았는데, 실은 그 나무를 해온 산이 작은아버지 산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작은어머니는 눈감아주시곤 했다. 

우리 집 뒤로는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에서 열리는 감은 참 크고 달았다. 우리는 부모님을 따라 판교장, 홍산장으로 그 감을 팔러 다녔다. 무거운 감을 짊어지는 사람은 역시 형님이었다. 

형님과 나는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거들었다. 독족골 논, 가금말 논, 참샘깨 밭 등을 돌아다니며 논바닥에 모를 심고, 돌아서면 자라나는 피를 뽑았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라는 속담처럼 추수철만 되면 배를 곯아가며 하루 종일 논바닥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물론 부모님의 노고에는 비할 수 없었다. 특히 아버지는 고된 일을 하고 와서는 가끔 하혈을 하셨다. 붉게 물들어가는 아버지의 바지를 보면서도 병원 한번 모시고 가지 못했다. 아니, 병원이 있는 줄도 몰랐다. 형님은 그때마다 무척 괴로워했지만 나는 마냥 무섭기만 했다.

한국전쟁이 난 뒤 집안 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할머니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고, 작은아버지는 인민군에 잡혀갔다. 경찰인 사촌형은 행방불명이 되어 끝끝내 소식이 없고, 막내 사촌형은 의용군으로 강제징집 되어 끌려갔다. 양식도 다 떨어져서 굶는 날도 많았다. 

어쩌다 시래기가 생기면 시래기를 푹 삶아 조금 있는 쌀을 넣고 물을 많이 넣어 죽을 끓였다. 그럴 때면 오식형님은 “시래기가 밥알보다 더 맛있네.”라고 하면서 시래기가 가득 든 죽을 게 눈 감추듯 먹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형님은 먹성도 좋았다. 그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이 먹어야 했다. 그렇지만 형님은 언제나 시래기가 많이 든 것은 자신이 먹고, 밥알이 많은 것은 내게 양보했다. 
 
▲ 옥산초등학교 졸업사진

누님들이 결혼을 하자 아버지 음식을 가져다 준 것도 형님과 나였다. 특히 첫째 누님과 셋째 누님은 충화면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곳은 우리 집에서 꽤 멀었다. 시골길을 걸어서 아버지 음식을 짋어지고 갔다가 돌아올 때면 누님들 시댁에서 음식을 싸주셨다. 오고가는 거리가 멀어서 아침 일찍 출발해도 해가 기울어져서야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몸집이 큰 형님은 짐까지 짊어진 터라 배가 많이 고팠는지 산봉우리를 넘다가 음식을 조금 먹고 가자고 나를 꼬드겼다. 그때만 해도 순진했던 나는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라고 하면서도 형님을 따라 고갯마루에 앉아 음식을 같이 먹었다. 초등학생인 나는 중학생인 형님이 아주 어른 같아 보였다. 그때 형님이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던 형님은 홍산농고를 다니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만난 형수와 결혼을 했다. 그 후 강경상고로 전학을 가서 사촌 집에 살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강경상고는 우리 집에서 50km가량 떨어진 먼 곳에 있었다. 

형님은 토요일마다 집에 왔다가 주일 저녁이면 다시 사촌 집으로 돌아갔는데, 버스표를 살돈이 없어서 걸어 다녀야 했다, 하지만 형님은 그  먼거리를 매주 빠지지 않고 왔다. 으슥한 밤이 되어서야 달을 등에 지고 집으로 들어오던 형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늘 한결같은 형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형님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오식 형님은 비록 성정은 여렸으나 그 끈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형님은 폐병에 걸렸는데,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외갓집에서 폐병에 뱀이 좋다면서 뱀을 잡아 보내주어 그걸 한 달 내내 먹더니 폐병이 완치되었다. 영양실조 때문에 생긴 병이라 뱀을 먹은 것이 효과적이었는지, 아무튼 형님은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 이 일은 끈질긴 형님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장남을 학교에 보냈으니 집에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집에서도 은근히 내가 농사 일 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를 진학하지 않는 반에 속해 있었다. 그런 내게 중학교 시험을 치라고 강권한 것은 형님이었다. 형님 덕분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형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가 토지개량조합에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는 토지개량조합을 ‘수리조합’이라고 불렀다. 토지개량조합을 다니던 형님은 어느 날 부흥사인 양춘식 목사에게 은혜를 받더니 농사짓던 땅을 팔아 교회를 개척했다. 

그 후 형님은 여러 시골 마을을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거기서 전도사 생활을 했다. 형님이 전도사가 되어 목회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형님이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을 무렵, 서울에 살던 내가 고향 집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마침 형님이 교회 심방을 마치고, 구슬땀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형님에게 “형님이 목회를 잘 하시니까 한신대 교역과를 다니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제안했다. 

그때 한신대 교역과에서는 목회과정을 밟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눈 여겨 보았다가 형님에게 맞겠다 싶어 이야기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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