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집과 교회 건축 (15회)
  제4장 목회를 시작하다

대학생과 노동자가 만나는 곳, 형제의 집

형제의 집은 교회 3층에 있었다. 형제의 집은 전태일 분신사건이 있은 뒤 박형규 목사가 노동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전태일이 노동법을 공부하면서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한 것처럼 제2, 제3의 전태일을 위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대학생들은 청계천과 중부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열고 노동법을 가르쳐주었다. 서울제일교회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은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찾아와 학생들과 어울려 공부도 하고, 친교도 나누었다. 

나의 역할은 형제의 집 대학생 교사들을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와준다는 사실을 잘 모르게 도왔다. 박 목사도 그것을 원하고, 나도 깊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깊이 개입했더라면 대학생들이 그토록 열심히, 또 자발적으로 형제의 집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형제의 집도 기관원들이 눈독을 들이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형제의 집 교사들은 주로 학생운동을 하는 이들이라 그들의 수법에 말려들지 않았다. 형제의 집은 오랜기간동안 서울제일교회 근처에 있는 노동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기관원이 잘못 파악한 정보를 교인들에게 흘리는 바람에 대학생이나 형제의 집 프로그램이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학생들과 교사들이 잘 설명을 해준 덕에 곧 오해가 풀렸다. 이기병 목사의 부인인 송마리아 사모가 중간에서 역할을 잘 해주어 불필요한 잡음을 잠재우기도 했다. 지금 모두가 기억나지 않지만 김경남, 구창완, 정강서, 박세현, 오세구, 정창균, 박혜숙, 황인하, 이창호, 박찬호, 주재석, 박시상 등 많은 사람이 형제의 집에서 교사로 봉사했다. 

내가 서울제일교회에 있을 때 김자중, 황규환, 주길찬 등이 장로로 있었고 고봉서는 협동 장로였다. 주길찬 장로는 중간에 이사를 갔다. 또 오랜 교인으로는 송금단, 옥수복 권사와 송일섭, 송옥순, 이길복, 이인숙 집사 등이 있다.
 
▲ 형제의 집 대학생들과 안병무 교수
 
서울제일교회 건축

1976년에 들어서 구청에서 한 장의 공문이 왔다. 1960년대에 건축허가를 받은 서울제일교회가 아직까지 완공하지 않고 있으니 모년 모월까지 건축하지 않으면 건축법에 의하여 허가를 취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제일교회는 이기병 목사가 교회를 개척한 뒤 1968년부터 교회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교회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어졌는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본당의 2층을 막아 3층으로 막아 3층에서 대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지하 1층은 창작과 비평사, 1층은 안경공장, 2층은 한일합섬에 세를 주었다. 

교회 앞 땅은 지하 2층과 고층으로 지을 수 있는 건물로 허가를 받았으나 2층의 골조공사만 마치고 건축비용이 없어 중단한 상태였다. 이기병 목사는 이 건물을 짓고 나면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로 북한선교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건축 도중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교회건축으로 인한 빚은 2,000만원에 이르렀다. 빚이 너무 많아서 교회 앞 땅은 세차장에 세를 주었다. 몇몇 교인이 그 땅을 여러 평으로 가분할해서 구두(口頭)로 소유하고 빚을 갚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문이 날아온 것이다. 

당시는 소위 용공사건으로 박형규 목사와 내가 남산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때였다. 이 사건으로 박 목사는 기소되어 서대문 구치소로 이송되었다가 기소 중지로 7월 6일에 나왔고, 나는 기소유예로 7월 3일에 먼저 나왔다. 

어느 날 박형규 목사가 나에게 “우리 두 사람이 같이 감옥에 드나들면 교회가 어려워진다. 앞으로 감옥 가는 일은 내가 할 테니 권 목사는 교회일만 하라.”라고 했다. 그때까지 박형규 목사와 나는 남산 부활절연합예배사건(소위 ‘내란음모예비사건’) 등으로 같이 감옥을 들락거렸다. 또 나는 긴급조치 위반사건으로, 박 목사는 민청학련사건 등으로 감옥에 갔으니,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그의 지적은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런 공문까지 오니 교회일 전담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1977년 수도권의 훈련총무를 사임하고 교회 일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이 공문에서 비롯되었다. 이 공문에는 서울제일교회를 문 닫게 하겠다는 음모가 깔려 있었다. 당시 서울제일교회는 건축을 할 능력과 형편이 되지 않았다. 기관원들이 이런 사정을 알고 공문을 보낸 것이다. 

이 문제로 구청에 상담을 하러 갔을 때 담당공무원이 자꾸 상담을 피하는 것을 보면서 내 짐작이 맞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공문을 보내면 교회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든지, 교회가 분열되든지 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다. 이런 사실을 박형규 목사에게 보고하자, 그도 “우리를 내쫓으려고 그러는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교회 내부회의를 거쳐 교회를 다시 건물을 짓되, 설계 원안을 축소해서 다시 건축허가를 받기로 결정했다. 변경된 설계는 예배를 드리는 본당은 그대로 두고, 고층으로 올린 계획이었던 앞 건물은 3층까지만 지어서 준공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지 아닌 대지, 구두로 나눈 세차장에 세 놓았던 땅은 해당 교인들의 협력으로 전부 정리를 했다. 

그런 후에 다시 관할구청에 가서 설계변경으로 서류를 접수하자, 이번에는 구청에서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설계 변경을 해서 건축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건축하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항의하자, 질질 끌다가 마침내 건축허가를 내주었다. 

결국 늦게나마 준공까지 받았다. 건물이 생긴 덕에 교회는 선교를 위한 준임대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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