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없이 살았다 (18회)
  제4장 목회를 시작하다

나는 주일날만 되면 울었다. 그러니 박형규 목사는 오죽했겠는가. 주요 교회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보안사의 공작에 놀아났다. 이러한 사실은 박 목사를 아프게 괴롭혔다. 나는 당시 박 목사의 명령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사선에서 총무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쫓겨난 박 목사는 교회 앞 길거리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폭력배들이 나타나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며 예배를 방해했다. 관활 경찰서에 신고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박 목사는 중부경찰서 앞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경찰서 앞이니 폭력배들의 무자비한 폭행은 피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만 6년에 걸친 노상예배가 시작되었다. 

박형규 목사는 1972년 11월 26일부터 1992년 8월 24일까지 20년 가까이 서울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그리고 20년이 되기 석 달 전에 사임했다. 위임목사 20년이면 원로목사 추대가 가능한데, 교회 재정ㅇ에 부담이 될까봐 일부러 20년을 다 채우지 않고 은퇴한 것이다. 

나는 박형규 목사가 성공한 목회자였다고 생각한다. 말할 수 없는 온갖 수난을 겪었지만, 끝내 목회에서는 승리했다. 박 목사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한국 교회의 자리는 휴전선 한 복판이어야 한다.” “교회의 자리는 남과 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박형규 목사는 정권이 바뀌는 중에도 한 번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이지 않았다. 그냥 예수만 바라보고 살았다. 박 목사는 그냥 쫓기는 예수였다. 

서울제일교회는 나에게 중요한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필리핀 주민 조직 프로그램에 갔다 오기도 했고, 부활절연합예배사건, 긴급조치사건, 선교자금사건, 용공사건 등 험난한 일을 모두 겪었다. 하지만 10년 동안 서울제일교회가 감싸주고 덮어주어 고단했던 1970년대를 행복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1970년대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항상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다했고, 신념을 갖고 살았으며, 내일이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서울제일교회는 내게 고마운 곳이기도 했다. 몇 번이나 감옥을 갔다 와도 매번 나를 받아주었다. 만일 내 삶의 모습에 기초가 있다면, 모두 박형규 목사와 서울제일교회 교인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귀한 교회를 갑자기 떠나게 되었다. 어느 날 박 목사가 불러서 찾아갔더니 한참을 망설이다가 “권 목사, 이제 종로5가로 가야겠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씀하셨다. 

“지학순 주교가 개신교에서 사선조직 당시 수고한 권호경 목사를 내놔야 가톨릭에서 사선위원장을 맡을 신부를 내놓겠다고 하셔. 다시 종로5가에 가서 사선 재건에 수고 좀 해줘.”

지학순 주교와 이미 협의했다는 말에 나는 결국 “네.”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1981년 4월까지 서울제일교회에서 시무하고 사선총무로 일하기 위해 종로5가로 떠났다. 
 
▲ 말년의 박형규 목사 [사진출처 ; CBS]

그런데 내가 떠나온 뒤로 박 목사 구타사건이 벌어지고, 교회가 분열되고, 교회에서 쫓겨난 박 목사와 교인들이 노상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과 같은 참담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니 내가 서울제일교회를 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사선에서 일하면서 계속 서울제일교회를 나갔다. 어느 날인가 어떤 장로의 아들이 나를 보더니 “야, 네가 그럴 수 있어?”라고 하면서 큰소리를 쳤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있다가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아니, 무서워서 슬쩍 피했다. 이미 교회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서울제일교회 분열과 관련하여 이런 일도 일화도 있다. 내가 K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을  할 때였는데, 당시 서울제일교회는 폭력배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보안사에는 서울제일교회를 담당하는 전담반이 있었다. 학생 담당자는 대위 출신이었고, 그 위의 준위는 신학교를 졸업한 종교대책반이었다. 그들이 교인들을 들쑤시고 다녔다. 

어느 날 민정수석 이학봉 밑에서 일하는 손 판사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민정수석과 나갈 테니 박 목사와 식사자리를 한번 마련해달라고 했다. 박 목사는 웬만하면 거절을 하지 않는 문이라 함께 모이게 되었다. 

이학봉은 경상도 출신으로 보안사령관 전두환 밑에서 일하던 정보담당 출신인데,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박 목사에게 “목사님, 우리 대장이 이거 빨리 해결하라고 그럽니다. 우리 애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대장’은 전두환 이었고, ‘우리 애들’은 보안사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박 목사는 특유의 모습으로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나는 민정수석이 실수를 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교회가 내홍을 겪고 있으니, 박 목사가 좀 기다려줬으면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박 목사는 목요기도회에서 민정수석과 식사자리에서 나눈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해버렸다. 그런데 예배도중 갑자기 손 판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니, 당신 언제 들었는데?”

“다 알지요. 교회문제 해결하려는데 이러시면 우리 대장(민정수석) 깨집니다.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지. 식사자리에서 그 얘기를 할 때 조금 예상하긴 했었다. 그냥 당신들 끼리 해결하지, 왜 그 양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했냐? 그 양반이 무서울 게 뭐가 있다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교회일은 잘 해결되지 않았다. 그들도 우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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