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재정비 답십리센터_2 (32회)
  제6장 도시빈민은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

이와 같은 상황은 빈민조직 선교운동을 하려는 우리의 힘을 빠지게 했다. 민중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통한 빈민조직 선교운동은 국민의 기본권이 박탈되고 정치적 자유가 없는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빈민조직 선교를 하기위해서는 정치적인 개입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수도권 실무자들은 이와 같은 의견에 뜻을 같이 했다. 하지만 총무인 조승혁 목사는 “주민조직을 하는 사람은 정치개입을 하면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것을 물론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조 목사는 총무직을 내려놓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우리가 자신을 내쫓았다고 쓴 조 목사의 글을 보았는데, 사실은 우리가 말을 듣지 않자 어쩔 수 없어서 나간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나는 수도권 주무간사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훈련총무를 하게 되었다. 훈련총무로서 나는 답십리센터의 실무자들을 훈련시켰다. 훈련생은 판자촌을 잘 알아야 하기에 우선 그 지역에 들어가 살아야 했다. 판자촌 주민 조직훈련의 교과서는 판자촌 자체였다. 훈련생은 판자촌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과 대화하고 그 대화를 통해 그 지역의 합의 구도를 파악해야 했다. 

나는 훈련생들에게 판자촌을 몇 번이고 그려보게 했다. 판자촌을 공부하고, 그 공부한 것을 토대로 판자촌의 생태학적 지도를 그리게 했다. 어느 판자촌에 몇 세대가 살고, 어느 판잣집에 사람이 잘 모이는지 등을 정리하게 한 것이다. 심지어 주민들의 성격까지 기록하게 했다. 그래서 어떤 훈련생은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집집마다 방문하기도 했다. 

신답초등학교 육성회비 건과 같이 주민들과 공감대를 이룬 일이 있으면 주민카드를 만들라고 했다. 조직가는 해당지역의 내, 외적 정보를 비롯하여 주민 개개인의 정보까지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정보는 물론 공동의 선, 주민조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고, 이 경우에도 개인의 사생활은 절대 보호해야한다는 사실을 훈련생들에게 강조하고 주지시켰다.

훈련생들을 매일 하루의 생활을 육하원칙에 따라 기록하고, 필요에 따라 그것을 자기가 그린 지역 지도에 추가했다. 나는 훈련생들이 항상 지역지도를 보고 자기 행동을 반성하며 다음날 실천할 일들을 계획하게 했다. 이러한 과정이 무엇보다 훈련생 자신을 조직적으로 다듬어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훈련생들이 작성한 행동기록을 가지고 나는 매주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대화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을 기르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물을 보게 했다. 또 사건을 만들어내고, 사건해결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서로 배우면서 잘못된 것은 스스로 수정해나갔다.

훈련생은 어떤 주민을 만나더라도 상황에 맞게 그 주민에 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거침없이 대화할 수 있어야 했다. 주민과 일치의식을 가져야 그 주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말보다는 실천적 행동이 빨라야 했다. 그래서 깊은 생각 없이 행동만 앞서는 것은 일을 그르칠 수 있음을 늘 상기시켜주었다. 
 
▲ 수도권 식구들과 관련있는 청계천 아이들

이밖에 주민, 학생, 젊은 목회자들의 단기훈련도 실시했다. 또 판자촌에 관심이 있는 교육학, 사회학, 신학 등을 전공한 교수들을 현장에 초대하여 자극과 협력을 받는 프로그램도 실시했다. 

이때는 정보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성경공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장소를 교회로 잡았다. 나는 한신대에서 인연을 맺은 교수들을 초청해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두고, 주민조직에 관한 회의를 하곤 했다. 

주민조직운동의 현장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터전이었다. 어리는 주민들의 삶에서 많은 지혜를 배웠다. 주민들이 사건들 속에서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 희망을 품고, 때로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무척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유신체제 감시아래 선 빈민교회

시대의 어둠은 계속되고 있었다.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정치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1969년 3선 개헌과 1971년 위수령을 발동하더니, 마침내 1972년 10월 17일 비상조치를 발표하면서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체제구축에 들어갔다. 

10월 유신체제 아래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는 설 곳이 없었다. 국민들은 헌법이 보장한 기본적인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 및 신고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권의 빈민선교사역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청계천 판잣촌에 다섯 가구당 한명씩 정보원이 있다는 유언비어는 곧 사실로 드러났다. 수도권 실무자들이 판자촌 주민들을 만나고 오면 즉시 기관원들이 찾아와서 어디에 갔었는지, 주구를 만났는지 일일이 캐묻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니 주민조직운동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반상회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반상회는 행정단위의 최하위 조직인 반을 구성하는 가구의 대표자들이 주로 친목을 도모하거나 공동의 안건을 토론하기 위해 매월 정기적으로 갖는 모임이었다. 반상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주민조직이 생긴 것은 1917년이었다. 

반상회는 원래 일제가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기구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6년 정례 반상회의 날(매월 25일)을 정하여 본격적으로 반상회를 열게 하였는데, 이 반상회는 당시 주민들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전국적으로 활성화된 반상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생활을 보고하고 감시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사회가 경직되고, 혼란스러워지는데도 억압의 사슬에 매인 언론은 재갈을 문 듯 침묵했다. 학생들이 데모를 해도, 고려대 정문 앞에 탱크가 진을 치고 있어도, 서울시청 앞 광장을 꽉 메운 시민아파트주민들이 골조공사비 일시불 상환 절대 반대를 피눈물 나게 외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광주대단지에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면서 몇 만 명의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도 취재하지 않거나, 사실관계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치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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