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고와 한신대 (8회)
  제2장 배움과 사회복지에 눈을 뜬 시절

한영고등학교에 처음 등교하던 날, 이원범이 따라와 나를 응원해주었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들어간 터라 수업을 따라잡기가 쉽지 만은 않았다. 다행히 야간으로 들어갔기에 낮 시간을 활용해 보충할 수 있었다. 나는 아침부터 일찍 종로에 있는 서울학원에 나가 중학교 1학년 기초부터 다시 공부했다. 

고등학교 시절 기억나는 사람으로는 교감인 최영목 선생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나중에 영목중ㆍ고등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한번은 교감실에 불려간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의아했지만, 곧 내가 신고 있는 구두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군부대에서 받은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학생 신분에 좋은 구두를 신고 있으니,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구두 이야기를 하다가 미군부대에서 근무한 일, 고향에 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 면담 끝에 나는 최 교감이 나의 작은아버지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나이가 많은데도 공부를 하는 게 기특해서인지 최 교감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를 주시하고 편의도 봐주었다. 나중에 한영고등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담임인 송도여 선생이다. 최 교감과 같이 공주사대를 나온 송 선생은 내게 진급 시험을 쳐보라고 권유해주셨는데, 그 덕분에 나는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2학년 2학기로 진급할 수 있었다. 낮에 학원을 다니며 나름 학업진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성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송 선생은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었고, 나 또한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홀로 지내느라 힘든 마음을 내보이며 그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했다. 나는 송 선생을 형님처럼 따랐다 .실제로 그와는 다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

학교생활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뒤늦게 하는 학업이어서 그런지 공부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드디어 대학원서를 써야 할 시기가 되었다. 입시원서를 준비하다가 나는 이전 해에 서울대 중문학과가 미달이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잘 하면 서울대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 싶어 서울대 중문학과로 원서를 써서 송 선생에게 가지고 갔다. 그런데 원서를 살펴보던 그의 표정이 신통치 않았다. 

“신학교를 간 다는 놈이 왜 서울대 중문학과 원서를 써 온거야?”
 
“작년에 거기가 미달이던데요.”
 
“너도 참...... 너 같은 놈이 많아서 이번에는 거기가 지원자가 많을 거다. 안 되는 줄 알고, 다시 한신대로 써가지고 와.”

송 선생은 내가 가지고 온 입학원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당시 한신대는 떨어지면 연세대 신학교에 간다고 할 정도로 들어가기가 무척 어려웠다. 한신대 선배들이 졸업 후 학사시험을 치면 서울대 학생들보다 점수가 높게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서울대 미달학과에 원서를 쓴 것이었다. 
 
하지만 송 선생의 단호한 지적 덕분에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신학교를 가고자 한 첫 마음대로 한신대에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한신대도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다. 내가 한신대에 입학한 1965년도 한신대의 경쟁률은 3대 1이었다. 그런데도 합격했으니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한영고등학교 졸업사진

나는 한번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사람과는 별일 없는 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다. 최 교감도 그렇지만 송 선생과는 꽤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 받았다. 또한 고마운 인연이 있다면 늦더라도 연락을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KNCC, 현재는 영문 약칭을 NCCK로 사용하고 있다.) 총무시절 나는 나를 미군부대로 발령한 연대 부관이 사는 곳을 물어물어 그 집을 찾아가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가 대대장으로 전출하면서 나를 미군부대로 추천한 것은 의무중대로 뱔령 낸 후에도 인사과의 일을 계속 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가 나를 미군부대로 뱔령 내주었기 때문에 토요일마다 학원에 나가 고등학교 편입을 준비할 수 있었고, 결국 꿈꾸던 신학교에 갈수 있었던 것이다. 
 
한신대를 나와 목사가 되고 KNCC 총무를 하게 된 것은, 물론 여러 인연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최초로 그 길을 갈수 있게 도움을 준 사람은 그 연대 부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참여
 
1965년 한신대에 입학할 무렵, 전국에서는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한일회담 일괄타결을 방침으로 정하면서 1965년 3월 6일부터 야당을 비롯하여 종교, 사회 문화단체와 재야에서는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본격화 했다.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외상을 만나 한일회담 일정에 합의하면서 대학가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하지만 한일회담 타결방침을 정한 박정희 정부는 그해 6월 3일에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정점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의 힘을 빌려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는 시위가 정부의 굴욕외교와 일본의 침략정책 등을 비판하는 것으로 확대되는데 대해 박정희 정부가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일조약의 정식조인을 하루 앞둔 1965년 6월 21일, 서울에서는 매국외교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여기에는 1만여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참여했다. 경찰은 이들의 가두시위를 원천봉쇄했다. 

마침내 한일조약이 조인되고 여당이 단독으로 한일조약 비준안을 통과시키자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이어나갔다. 박정희 정부는 8월 26일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무차별적으로 진압했다. 

나는 한신대 선배들과 함께 예전의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서 시위에 나섰다가 선배들과 함께 성북경찰서로 끌려갔다. 몇몇 선배들은 징역을 살기도 했지만, 나는 1학년이라는 이유로 3일 동안 조사만 받고 풀려났다. 

그 뒤로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인해 경찰서 신세를 두세 번 더 졌다. 그런데 신 모 형사라는 사람이 그때부터 나를 계속 감시하면서 따라다녔다. 이원범이 내 친구인 것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이원범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상여소리를 하여 구류를 살 때 내가 면회를 간 적이 있는데, 그것을 보고 나도 그와 같은 데모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학생운동을 한다기 보다 한일회담의 굴욕적 상황에 대한 울분과 선배들의 권유로 시위에 참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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