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기초와 와우아파트 붕괴(21회)
  제5장 주민조직운동과 도시선교

조직의 기초는 주민자신들의 이해관계이다

우리는 처음 몇 주간을 사람들과 친해지는데 주력하고, 이를 통해 주민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공통된 문제를 파악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문제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 주민들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고 있을 무렵 10동에 살던 한 주부가 불분명한 이유로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방 천장의 일부 자재가 떨어져 어린 아이가 사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26동에 살던 동장이 아파트를 건축하고 뒤에 버려져 있던 벽돌에 맞아 숨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아파트를 부실하게 지어서 일어난 사고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우리를 바라보는 몇몇 주민들의 시선이 달갑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젊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묻고 다니니 우리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정부의 대리인이라는 소문에서부터 반정부주의자들이라는 소문까지 났다. 타 지역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다른 훈련생들도 같은 의심을 받았다. 

이럴 때는 주민들에게 우리가 그들이 처한 문제를 알고 싶어하며, 그들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믿게 해야 했다. 마침 그것을 증명해 보일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시민아파트는 산의 경사면에 지어진 경우가 많아서 반지하처럼 빈공간이 있었다. 초기에는 이 빈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조차 없었으나 이후 정부는 이 공간을 동네 시장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그 권리를 아파트입주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주기로 결정했다. 이런 내용의 기사가 <중앙일보>에 실렸다. 우리는 주민들에게 이 기사를 보여주었다. 정부에서 주는 특혜를 받으라는 뜻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시민아파트에 사는 주민 중에 지하실에서 사업을 할 만큼 돈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바람에 돈 많은 외지인들이 싼값에 지하실 상가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를 곱지 않게 보는 아파트주민들과 상가에 들어온 외지인들 사이에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 외지인들은 그들의 돈과 권력으로 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억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싸움은 돈 많은 외지인 사업가들에게 유리했다. 그들은 대개 공무원과 여러 방식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주민들은 어려운 정치적인 갈등이 일어날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지하실 특권이 아파트 주민들의 자립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참여했다. 우선 조직이 필요했다. 우리는 94동과 15동, 16동 주민들과 만나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탄원서를 작성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각동의 주민들 중에서 지도자를 세워 그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도록 했다. 
 
▲ 1969년의 금화아파트 / 한옥들로 정비된 주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일은 꽤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주민들은 지역 국회의원들과 만나 이 이 문제를 논의했고, 공정한 대답도 얻어냈다. 그들은 스스로 쟁취한 미래의 희망을 꽤 뿌듯해했다. 주민들이 스스로 힘을 가지고 권익을 챙기는 모습을 보자 우리가 애초 이루려고 한 주민조직의 성과도 좋을 것 같았다. 

모든 게 잘 진행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와우시민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서울시장이 모든 시민아파트의 지하실을 시멘트로 막아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한 주민들이나 우리도 무엇보다 안전이 가장 중요하니 정부의 조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민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받은 훈련의 내용은 긍정적이었다. 주민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조직을 만다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조민조직이 주민자신들의 이익과 결부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린스키가 말한 조직방법론의 원칙 중에 “조직은 힘의 전제조건이다. 조직의 조건은 조민 자신들의 이해관계이다”라는 것이 있다. 금화아파트에서 지하실 건을 문제로 파악하고, 주민조직을 이루어 낸 것은 그 원칙을 확인해본 좋은 경험이었다. 애초의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배움을 얻은 것은 나에게 큰 성과였다. 

와우아파트 붕괴

1960년대 서울에서는 도심이든 외곽이든 판자촌이 즐비했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농촌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무허가 판자촌이 우후죽순 늘어나자 정부에서는 이를 정비하기 위해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그 중 하나는 시민아파트를 건설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철거민들을 도시 변두리로 집단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한번은 청계천 판자촌에 불이 났는데, 소방관이 와서 구경만 하고 불을 끄지 않았다고 한다. 당국에서는 불법 판자촌이어서 어차피 헐어야 하기 때문에 불을 끄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판자촌을 철거하고 판자촌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 준장 출신 김현옥 씨를 서울시장으로 임명하고 시민아파트를 짓게 했다. 서울시는 이 일을 신속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아파트의 골조만 짓고 나머지 내부공사는 입주자가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시민아파트를 건설하려는 ‘불도저 시장’의 무리한 의욕은 많은 문제를 낳았다. 게다가 당시 만연하던 건설업계의 부패도 심각한 문제였다. 지질 안전검사도 없을뿐더러 하청업체들은 건설자재를 빼돌리기 일쑤였다. 이는 총체적인 부실공사로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와우아파트가 붕괴되었다.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산중턱에 위치한 와우아파트는 지상 5층, 15개 동 규모로 건설되었는데, 완공 4개월 만에 부실공사로 인해 내부 중량을 견디지 못하고 한 동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 사고로 주민 33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다쳤다. 또한 무너진 건물 잔해가 아래에 있던 판잣집을 덥쳐 잠을 자고 있던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에 착공해 6개월 뒤인 그해 12월에 준공했다. 6개월 만에 그 많은 동을 지었으니 얼마나 부실하게 지어졌겠는가. 게다가 와우아파트는 70도 경사의 산비탈을 견딜 수 있는 기둥을 만드는데 적어도 70개의 철근이 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5개로 줄인데다 건물을 견고하게 하는 시멘트도 거의 섞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입주 때부터 벽 곳곳에 이미 금이 가 있었다고 한다. 관활 구청장과 건축과장은 그해 4월 3일 가장 위험해 보이는 14동의 주민들을 15동으로 대피시켰다. 15동은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실한 공사뿐만 아니라 행정판단도 미숙했던 것이다. 

 
  나의 훈련현장 금화 시민아파트 (20회)
  와우아파트 붕괴 후 자치운영연합회 조직 (22회)
  |11||12||13||14||15||16||17||18||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