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다 (6회)
  제1장 가족이라는 울타리

집을 떠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따라 홍연교회를 다녔다. 어느 날, 홍연교회에 아주 젋은 목사가 새로 부임했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신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백응찬 목사였다. 

그런데 그의 목회 방법이 참 특별했다. 예를 들면 교인들에게 ‘땅호박’ 기르는 방법을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땅호박은 넝쿨 없이 땅에서 자라는 식물로 당시 그 품종은 농민에게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백 목사는 이처럼 생소한 품종을 소개하거나 고구마순으로 고구마를 기르는 방법 등 여태껏 알지 못했던 농법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교회학교 아이들에게는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나는 백 목사의 목회방법에 한마디로 빠져들었다. 어느 목사처럼 성경만 가르치고,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신농법’을 알려주고 시골 아이들에게는 생소한 영어를 가르쳐주는 백 목사를 통해 나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아, 나도 저 분처럼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쳐야겠다.’ 나는 어느새 나의 장래에 대한 이러한 꿈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짓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래서 한 1년 가량은 농사만 짓고 살았다. 

그 사이 신학교를 준비하기 위해 6개월 정도 충남노회에서 운영하는 고등성경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농사를 짓다보니 이래가지고는 도무지 신학교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농사는 끊임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일손은 늘 부족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된다면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할 게 뻔했다. 

나는 내심 때를 기다렸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서울로 가자.’ 이렇게 2년 정도 기다리다가 어느 날 인가 집을 떠났다. 소위 가출인 셈인데, 막상 떠나려고 보니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방앗간에 가서 쌀값을 미리 받아 그 돈을 챙겨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로 가면 생활비가 필요할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내가 가진 돈으로 서울에서 생활하는 건 언강생심이었다. 

그때가 1958년이나 59년 정도 되었는데, 내가 자리 잡은 삼각지는 일대가 전부 판자촌이었다. 나는 거기서 쌀 한 톨 구경하지 못했다. 군인들이 뒤로 슬쩍 해서 팔아먹는 쌀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골에서 막 상경한 나에게 그것은 아주 낮선 풍경이었다. 

당시 우리집은 고생 끝에 형편이 좀 나아져서 중농정도는 되었다. 덕분에 집에서는 적어도 밥은 굶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집도 구하고, 밥도 매끼 사먹어야 하니 도무지 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모자공장으로 

사정이 이러다보니 결국 학교는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 공장에 들어갔다. 주로 군인들의 모자를 만드는 모자공장이었다. 직원이라고 해봐야 나를 포함해 16명 정도였다. 한눈에도 모두들 나보다 어려 보였는데, 짐작대로 16살에서 20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친구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공장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먹는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식사는 상으로 사용하는 기다란 널빤지 위에 놓인 밥과 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이 전부였다. 

▲ 1950년대 말 서울의 용산기지 거리 [출처 ; 국가기록원]

식사시간이 되면 우리는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였다. 널빤지 위에 놓인 반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개별로 주어지는 밥과 국은 손도 대지 않고 공동으로 주어지는 반찬부터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밥부터 먼저 먹던 나는 반찬이 금세 동나버리는 통에 국에다 밥만 말아먹어야 했다. 사장의 딸이 반찬을 추가로 갖다 주기도 했지만, 넉넉하지 않은 그 반찬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창 많이 먹고 클 나이인 동료들은 늘 배가 고팠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 그릇의 밥과 국만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는 동료들처럼 공동으로 나온 반찬을 먼저 먹기 위해 젓가락을 들고 눈치 싸움에 동참하고 있었다. 

우리 집이 농사를 짓고 살아서인지 그전까지 나는 배고픔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다들 못 먹고 살기도 했지만, 당시 어렸던 나는 그리 절실하게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자라는 동안에도 먹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었다. 시골은 도시에 비하면 먹을 것만큼은 풍족했다. 시골의 땅은 때가 되면 곡식이며 찬거리를 내놓았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푸성귀 하나를 사는데도 돈이 필요했다. 나는 공장생활을 하는 동안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배가 고픈데도 먹을 것이 없다는 것과 일을 해야만 겨우 배고픔을 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조차도 배불리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꽤 충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 동료 중 내 또래의 한 친구가 모자를 쓰고 나갔다가 모자 없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모자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도 표정이 좋아보였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공장에서 하자가 있는 모자를 가지고 나가 풀빵 집에 가서 팔고, 그 대가로 빵을 얻어먹고 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의 잔머리에 놀라면서도 쉽게 따라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배고픔이 주는 유혹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하루의 일과가 끝난 어느 날, 나는 빼돌린 모자를 쓰고 공장문을 나섰다. 어둑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친구가 알려준 풀빵집이 보였다. 풀빵집 앞에 다다른 나는 모자를 벗고 그 앞을 쭈뼛거리며 왔다 갔다 했다. 어색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한 풀빵집 주인이 내게 손짓하더니 풀빵 두어 개를 봉지에 담아 건넸다. 

나는 얼른 모자를 넘겨주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로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쏘아보는 듯했다. 걸어가면서 풀빵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지만 웬지 모르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배가 고팠으나 모자와 맞바꾼 풀빵은 배고픔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런 일도 배짱이 있어야 했다. 배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양심에 걸려서인지 나는 그 뒤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공장을 다니는 동안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공장을 다니자니 학교를 다닐 수 없고, 학교를 다니자니 돈을 벌수 없는 상황이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온 것인데, 이도저도 하지 못하니 나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결국 나는 오랜 고민 끝에 군대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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