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향해 사신 아버지, 하늘을 향해 사신 어머니 (1회)
  제1장 가족이라는 울타리

나의 아버지는 농부였다. 한평생 땅을 일구고 거기서 나온 소출로 가족들을 건사했다. 아버지는 농부의 삶에서 딱 한번 벗어난 적이 있는데, 1929년 대규모로 시행된 저수지 공사에서 일하게 됐을 때였다.

아버지(권영기, 안동 권씨 추밀공파 34대손)는 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충남 부여군 옥산면 가덕리에 소재한 할아버지의 집에서 살다가 분가를 했다. 어머니의 신앙 때문이었다. 어머니(최병학)는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에서 4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는데, 먼 동네인 옥산군 가덕면 금지리에서 중신이 들어오자 무조건 결혼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 역시 신앙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뚜’라는 중국인 전도 부인의 전도로 일찍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뚜부인은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 나섰는데, 그곳이 마침 외할아버지가 하던 서당이었다고 한다. 뚜부인은 한문에 밝은 어머니를 눈여겨 보고 전도를 했다. 예수를 믿게 된 어머니는 홍산면에 있는 홍산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은 걸어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데다 높은 고개를 넘어야만 하는 곳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달렸다. 이름도 없이 ‘최씨’로만 불리던 어머니는 항렬자인 ‘병’과 배울 ‘학’을 합쳐서 스스로 병학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어머니에게 교회는 신앙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는 거듭남을 준 곳이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한학을 하신 분이라 딸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몹시 언짢아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고집과 열정은 더 대단했다.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딸이 혹시 해를 당하기라도 할까봐 딸을 따라 교회에 다니던 외할머니도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까지 예수를 믿게 되자 더욱더 못마땅하게 생각해 어머니를 일찍 시집보내려고 여러 군데 중신을 놓았다. 그리하여 옥산면 가덕리로 시집을 가게 된 18살 어머니는 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다고 한다. 가덕리에서 홍산교회까지는 넓은 들판과 냇가만 건너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갓 시집온 새색시가 명주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고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다보니 시아버지의 귀에 까지 소문이 들어갔고, 결국 며느리가 드나드는 곳이 교회인 것을 알게 되었다.

노발대발한 할아버지는 그 길로 어머니를 쫓아내버렸다. 한 밤중에 쫓겨난 부모님이 도착한 곳은 옥산면의 ‘안동 굴’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뗏장을 올린 뗏집을 지었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농사꾼 자리를 잃게 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서 저수지공사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공사판의 인부가 되었다. 그 저수지가 지금의 옥산저수지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일해서 모은 돈 13원으로 홍연리 108번지에 집을 마련했다.
 
▲ 아버지, 권영기

마침 집에서 들판 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에 홍연교회가 있었다. 어머니는 눈이오나 비가 오나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녔다. 뚜부인을 따라다니며 전도도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목음도 전했다. 어머니의 이런 열성으로 인해 그 근방에서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이런 어머니에게 질렸는지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큰 누님 역시 아들이 장로인데도 끝내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형님의 장남인 조카 권주만은 우리 부모님과 같이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는 내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있을 때에도 어머니와 같이 살았다. 조카의 말에 따르면, 연로하신 어머니는 눈이 오는 날 새벽기도에 갔다가 고무신이 벗겨진 줄도 모른 채 집에 오시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 날이 밝는 대로 조카들이 들판에 나가 고무신을 찾아왔다.

나에게도 어머니는 특별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모범을 보이셨다. 한국전쟁 때 받은 충격 때문인지 동네에는 정신이상자들이 많았다.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종종 우리집 뒷산에 올라가 밤새도록 울면서 소리를 지르다 아침이 되면 동네로 내려와 밥을 얻어먹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와 대면하기를 꺼려했다.
 
하루는 그 사람이 우리집으로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우리집 대문 간에 상을 차려내왔다. 그것을 보고 우리집 식구들만 놀란 게 아니었다. 무슨 구경거리가 난 듯 동네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을 구경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도와줄 수 있는 만큼 도와주었다. 한번은 모시베를 짜던 옆집 아주머니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채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우리가 먹던 밥을 조금씩 덜어 고추장에 비벼서 가져다 준 적도 있었다. 당시는 우리집도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아 밥에 온갖 시레기를 넣어 먹을 때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렵게 사시는 이웃을 모르는 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 모두에게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가난한 집일수록 더 잘 챙기고 살뜰하게 챙겼다. 누구네 집이 배를 곯고 있는지, 어떤 사정이 생겼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힘껏 도우려고 했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연세 많으신 어른들은 나를 ‘최병학 권사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 어른들에게 나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던 최병학 권사의 기도로 오늘을 살고 있는 권호경인 것이다.

아버지는 1965년 1월 1일(음력) 65세를 일기로 고향 집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1980년 6월 22일 7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내가 감옥에 들락거리면서부터 몸이 좋아지셨다. 어려움에 처한 아들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굳은 의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투옥 중에 있던 나는 어머니가 가끔 시골에서 종로5가까지 와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구속자 기도회에서 “김종필, 나쁜 놈 나와라!”하고 일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김종필의 부모가 어머니의 친정과 가까운 동네에 살아서 친분이 있어 더 서운하셨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나를 믿고,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어머니가 곧 운명하실 것 같다며 형님이 다급하게 연락을 해왔다. 어머니는 당시 형님이 목회하던 보령시 성주면에서 형님과 같이 살고 계셨다. 나는 서둘러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노환으로 석 달째 누워계신 상태였다. 그동안 어머니는 말씀을 거의 못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나를 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쁜 놈!”이라고 한 말씀 하셨다. 그것은 내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고, 자기 마음대로 평생 외지를 떠돌아다닌다고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었다. 장례 후 우리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묻힌 선산(서천군 문산면 금복리 산 60번지)에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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