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력 -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대학교 영화학연구소에서 수학했으며 현대 불문학 학위를 취득했다.
1959년부터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극단 민중극장, 극단 자유의 동인으로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 등 5편의 연극대본을 썼고, '따라지의 향연'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등 100여편이 넘는 연극작품을 연출했다.
1987년에는 영화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를 감독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 학장과 예술대학원 초대원장을 역임했으며, 국제극예술협회(ITI)세계본부 회장을 3차례 연임(7년간)하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예술원 회장을 역임했다.
나, 살아남은 자의 사설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주변 친지들이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2차 대전 때에는 한반도는 전쟁터가 아니어서 간접 체험을 했다면, 한국전쟁은 한반도가 전쟁터였고 6년제를 졸업하고 대학에 막 들어간 연령이어서 직접 체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와중에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선배나 친구들은 전쟁터에서 군인으로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았으나, 병사가 아닌 민간인으로서 좌우의 이념 갈등으로 희생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전쟁의 혼란과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詩) 중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번역자가 붙인 제목이고 원제목은 ‘나, 살아남은 자’이다. 나는 이제 만 88세가 되었다. 나는 살아남았다기보다도 살아남아서 처진 낙오자(落伍者)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의 파편이 되어 녹슬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살아남은 자’의 감회(感懷)는 단순히 슬프다는 어휘로 표현되기 힘들다. 슬픔과 분노, 찌꺼기가 되어 살아남은 것 같은 허전함과 억울함, 찜찜함...... 물론 나는 브레히트의 시의 한 구절처럼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운이 좋아서라면 억세게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그보다도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분자(灰色分子)였기 때문에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동족상잔의 가혹한 이념 갈등 속에서 회색분자도 양쪽에서 가차 없이 처형되고 숙청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본색(本色)을 드러내지 않는 회색분자서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하여튼 나는 살아남았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간 친구들, 그들을 위해 뭔가 고백하고 증언하고 뭔가 진혼(鎭魂)하는 굿판을 벌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연극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연극을 하지 않는다. 극작이나 연출을 하지 않고 책을 쓰기로 했다. ‘살아남은 자’로서 반세기 넘게 구상해왔던, 아니면 숨겨왔던 이야기를 그들을 위한 증언 또는 진혼의 사설로 삼으려 한다.
솔직하게 전통적 회고록으로 쓰는 게 어떻겠느냐는 충고도 있었지만 역시 ‘위장자’의 버릇이랄까, 그래서 건방진 문학소년 시절의 호(号) 석두(夕杜, 신석정과 두보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라는 인물이 이야기 하는 형식의 ‘사소설(私小說)적 소설’ 또는 ‘연극적(演劇的)’소설로 꾸며보려 한 것이다.
2020년 2월 11일
얼굴박물관에서
구맥회의 석두를 추억하며
추신_ 한편 작년에 낸 이 회고록이 히스토리스의 지면에 연재되게 되어 보다 많은 분들과 나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다시 한번 지난날을 돌아보며 독자들과의 공감대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자 註 ; 저자도 위 사설에서 언급했거니와 이 회고록은 전통적 의미에서 회고록은 아닙니다. 문학소년 시절의 김정옥 선생의 호인 '석두(夕杜)'라는 화자가 이끌어 나가는 3인칭 소설형식의 독특한 회고록입니다.
이를 계기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허구를 가미해서 서사하는 소설도 많거니와, 반대로 자신의 체험을 소설적으로 끌어가는 이런 형식의 회고록이 진일보하는 다양한 실험이 활성화되기를 소망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