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루문동에 돌아오자 서홍은 친구들을 만나고 정보를 얻는다고 열심히 뛰어다녔으나, 석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세상이 바뀌니까 뭔가 한자리 해볼 양으로 뛰어다니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서홍이 새로 조직된 민청(民靑)에서 인민군 환영대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니 주최 측 요원으로 참가하자고 했으나 석두는 나중에 구경이나 가겠다고 했다. 나중에 석두 혼자서 나가보니 환영대회는 어느새 환영행진으로 변모해서 꽤 많은 군중이 인민군 만세, 김일성장군 만세를 외치며 금남로에서 황금정 쪽으로 행진해왔다. 그 행진에 끼어들지 않고 석두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 구경꾼 속에 여류화가 천 여사의 모습이 보였다.
“천 선생님......”
석두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군중, 낮선 이방인들 속에서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몰랐다.
김일성 장군 만세, 인민군 만세라는 구호가 되풀이 되어서 외쳐졌는데, 누군가가 “박헌영 동지 만세!”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군중의 행렬들도 “박헌영 동지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인민군 복장의 두 병사가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며 박헌영 동지 만세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두 병사는 박헌영 동지 만세를 외친 청년을 호되게 몰아세우는 눈치였다.
이 광경을 보며 천 여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시작인데.......벌써 저러니.’ 석두는 다 알아봤다는 표정으로 천 여사를 쳐다봤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육중한 몸매의 구식비행기가 나타나서 환영행렬의 군중에게 기총사격을 해왔다. 열띤 환영행렬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석두는 건물 속으로 피신하면서 천 여사와는 헤어지고 말았다.
호주댁 비행기와 다른 육중한 비행기는 군중들이 흩어지자 금방 사라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왕좌왕 했고, 기총사격에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사람도 없지 않은 듯 제복을 입고 들것을 든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환영대회가 씁쓸한 풍경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 석두는 역시 구맥회 멤버였고 방화범으로 몰린 적이 있는 박내진(朴來珍)을 만나 함께 모교로 갔다. 군사훈련을 위한 무기고가 개방되고 거기에 있던 일본제 38소총을 민간인들이 모두 가지고 갔다. 교내는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으나 교사 저편의 별관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가볼까 하고 둘이는 망설였는데, 그때 완장을 두른 청년이기보다 소년에 가까운 학생이 누군가를 포박하고 끌고 왔다. 포박당하고 끌려오는 학생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이다. 운동시험 같은 행사가 있을 때 응원단장으로 나와서 까불던 허방원이다. 허방원이가 학련에 가담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체포되어 끌려올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석두는 박내진을 처다 보았다. 그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련 학생들이 좌익계 학생들을 체포하는데 앞장 선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응원단장을 한 허방원 같은 친구를 같은 학급의 친구나 선후배가 체포해서 끌고 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석두는 생각했다.
석두는 허방원을 체포해서 끌고 오는 학생을 불렀다. 그는 덩치는 컸지만 중학교 4학년 정도의 어린 얼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높은 사람이고 누가 권력을 가진 사람인지 뚜렷하지 않다. 그래서 보다 높은 상위조직의 실력자처럼 보여야 한다. 석두는 그에게 포승을 풀어주라고 명령처럼 말했다. 그는 의아스런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허방원의 포승을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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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당시 독립문에 걸린 김일성, 스탈린 초상화와 환영 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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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동무, 이 친구 허방원이야.”
석두가 이렇게 말하자 박내진도 눈치를 채고 거들었다.
“그래, 이 친구는 우리가 조사를 해봐야 해. 이 친구는 우리한테 맡기고 그냥 가봐.”
그는 석두와 박내진이 선배라는 것을 알아본 듯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우물쭈물 말을 이어가려 했다.
“그대로 보고해! 애는 우리가 조사할 테니까. 민청본부로 데리고 가서 조사할 테니까.”
“네, 알았습니다.”
그는 교사 별관 쪽으로 향했다. 석두와 서홍은 허방원을 데리고 교문을 나왔다.
“우리는 이쪽으로 갈 테니 너는 저쪽으로 가라.”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허방원이 눈치를 채고 골목길로 뛰어가서 줄행랑을 쳤다. 엉겁결에 당해서 끌려왔지만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고 할까? 그는 석두와 서홍에게 멀리서 손을 들어 경례를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광주시 민청(民靑)은 서중(西中)의 좌익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으로 발족되었다. 위원장에는 석두보다 4년 선배인 박용택이 추대형식으로 선출되었다. 뭘 할 줄은 몰랐지만 자유롭고 희망에 부푼 분위기였다. 그러나 5일 후 북쪽에서 내려온 공작반이 도착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민청의 경우 그들은 박용택부터 시작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전원의 신분검사를 했다. 소위 투쟁경력과 당성을 심사해서 조직을 재편한 것이다. 좌익계 학생들의 존경을 받던 박용택은 위원장에서 평의원으로 내려앉았다. 투쟁경력은 있지만 남한당국에 검거되어 결과적으로 조직에서 빨리 이탈된 사람은 조직의 중요한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반대로 뚜렷한 투쟁경력은 없더라도 조직에 오래 남은 사람은 그만큼 더 평가되는 것 같았다.
서홍은 시민청에서 도민청(道民靑) 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석두는 시민청의 위원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변화가 석두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서홍과 서로 떨어져 있게 된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새로 옮겨온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인 박용택은 존경심을 일으키기는 품위랄까, 리더십을 느끼게 하는데 새로 배치된 위원장은 그렇지 못했다.
무식한 친구가 위원장을 하려니 괜히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았고, 부위원장은 눈치만 살피는 음흉한 인물로 느껴졌다. 매일아침 쓸데없이 회의를 한다고 시간을 보내고,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 것은 매일 아침마다 전원이 돌아가며 ‘자아비판’을 강요당한다는 점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일과처럼 ‘자아비판’을 하니 자아비판을 할 건덕지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아침마다 이것저것 꾸며대서 자아비판을 하고 뉘우치고 하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위원들의 진실성이 결여된 자아비판을 듣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종교는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에게 용서를 빌라고 하는데, 굥산주의는 당을 향해서 스스로의 잘못을 규탄하고 뉘우치고 당에의 충성심을 맹세하도록 강요하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