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교에서 중학교로
나, 석두(夕杜)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의사로서 공의(公醫)였던 부친을 따라 전라남도 영암군 독천소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해남군 송지면 산정소학교에, 다시 4학년 때 나주군 남평소학교로 전학했다. 1944년 남평소학교를 졸업, 같은 해 4월에 광주 서중학교에 입학했다.
일제시대 때 부친이 개업의이자 공의였던 석두는 꽤 부유한 집에서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 영암의 독천소학교 때는 집에 오토바이가 있었다. 송지면의 산정소학교 때는 어느 날 부친이 네모진 포드자동차를 몰고 왔다. 남평소학교 때는 포드자동차 말고 영국 차를 한 대 더 사와서 집에 두 대의 자가용이 있을 때도 있었다.
일제말기 전시에 자가용이 있었다면 꽤 부자였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부자가 아니고 부친이 있는 대로 돈을 쓰는 소비형 타입이었는지 모른다. 하여튼 석두는 광주 서중 입학식 때 모친과 함께 포드자동차를 타고 나타나 주목을 받고 화제가 되었다.
소학교 시절의 석두는 일본말로 ‘겐가도리’였다. ‘싸움쟁이’라는 뜻이다. 소학교를 만 6세에 들어가 동급생들보다 한두 살 아래였으나 누구한테도 지지 않으려고 하고 일본 소학생들과도 곧잘 싸웠다. 그래서 석두 모친은 그가 장차 군인이 되지 않을까 했다.
소학교 시절에는 ‘고쿠고죠오[國語常用]’라고해서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해야 했다. 석두의 형은 석두보다 2학년 상급생이었는데 석두를 만나면 피해서 다녔었다. ‘형’ 하고 달려가서 집에서처럼 우리말로 거침없이 떠들었기 때문에 벌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석두는 외향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간 석두는 달아졌다. 외향적인 성격에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한 것이다. 광주서중에는 한 학년에 3학급이 있었는데 한 학급이 60명, 석두는 2조였다. 그 중에서 석두는 키의 순서대로 해서 44번, 그러니까 그만큼 어리고 왜소하기도 했지만, 180명의 한 학년에 100명 정도가 광주(光州)에 있는 서석(瑞石) 소학교 출신들이어서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기가 죽기 마련이었다. (일제시대에는 키가 가장 큰 학생이 1번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석두는 내성적인 얌전한 학생이 되었으며, 과외활동도 별로 인기가 없어 지원자가 없는 원예반(園藝班)에 들어가 온실의 식물이나 꽃을 가꾸고 ‘쓰루미 유스케[鶴見佑輔]’라는 일본 작가의 대중소설을 탐독하기도 했다.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말기에 들어선 일본은 중학교 교육도 엄격한 전시 체제의 교육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군사교육 시간이 늘어나고 중위 출신의 일본인 배속장교와 일본군 상등병(上等兵) 출신의 조선의 조교가 설치는 판이었다.
어느 날 석두는 배속장교로부터 뺨을 얻어맞았다. 석두는 어리둥절했다. 왜 뺨을 맞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배속장교가 일본말로 “차렷!” 하고 외쳤는데, 긴장하지 않고 웃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웃지 않았습니다!”하고 석두는 항변했으나, 웃는 표정이라고 해서 뺨을 얻어맞은 것이다. 황국신민(皇國臣民)되기 더럽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역사 선생 ‘아루가’라는 일본인 선생이 “조선 반도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닮았다. 일본의 규슈(九州) 젖을 빠는 애와 같은 모습이다. 일본은 조선의 젖을 빨아 성장했다. 그러나 젖을 일본에 먹여 일본을 성장시킨 조선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생리다.”라며 그럴싸하게 떠들어 댔다.
일본이 조선의 젖을 먹고 성장했다고 말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러니 조선이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니 배은망덕한 논법이다.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말할 수 없는 ‘반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루가’ 선생은 오히려 조선의 소년들에게 반감을 품으라고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른다. 아루가 선생은 그의 진보적 성향 때문에 일본의 명문 중학교에서 광주서중에 좌천되어 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석두가 광주서중에 입학한지 반년, 1학년 2학기가 되자 학교교육은 전폐(全閉)되고 매일같이 군사동원의 명목으로 송근채취다, 비행장 건설이다 하는 노역에 동원되었다. 광주의 비행장 건설에는 아예 전교생이 합숙하고 노역(勞役)에 동원되었다.
‘중학생들의 노역으로 만들어진 비행장에서 전투기가 뜰 수 있을까? 송근(松根)에서 추출한 기름으로 전투기가 뜰 수 있을까?’ 어지간히 패색이 짙어가고 있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교실에서의 공부에서 해방되어 합숙하고 노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를 만끽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교관들도 학생들의 웬만한 탈선에는 눈감아 주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부를 수 없었던 외설적인 일본 유행가를 소리 높여 합창하고 주간에 강요되었던 노역의 피로를 풀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8월은 평소 같으면 방학기간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대동아전쟁 말기, 그날도 군사동원명목으로 송근을 채취한다고 동원되었다. 송근에서 기름을 채취해 비행기를 띄운다니 꿈같은 얘기였지만, 그때는 그러려니 생각하고 매일같이 군사동원으로 끌려 다녔다. 중학교 2학년, 13세에서 15세의 소년들이 매일같이 비행장건설이나 송근유 채취다 해서 고된 육체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석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군사동원을 까먹기로 마음 먹었다. 본능적인 반항심이 발동한 것일까? 석두는 그날 군사동원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또 얻어맞거나 벌을 받지 않을까 겁이 났다. 기왕 벌을 받을 바에는 며칠간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농땡이를 부릴 결심을 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점심 무렵에 군사동원에 갔던 친구들이 흩어져서 돌아왔다.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사동원도 오전만 하고 해산했다는 것이다. 석두는 어리둥절했으나, 오늘따라 군사동원을 까먹은 것이 마치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처럼 우쭐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일본의 항복이 우리에겐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리에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일본인 교사들이 무릎을 꿇고 상급반 학생들에게 그동안의 잘못을 사죄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