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와 반탁 (2회)

그러나 해방된 꿈과 같은 감격의 시대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는 신탁통치 안이 어린 소년들에게도 분열과 대립의 암운(暗雲)을 드리웠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른바 반탁학생 연맹은 미 군정과 집권정부와 손을 잡은 어용단체였고,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이른바 친탁파는 지하조직으로 숨어들었다.

석두는 2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는데, 혼란 속에 4학년이 되었다. 4학년은 입학 당시 그대로 해서 세 반이 있었는데 한 반은 역시 60명이었다. 60명 가운데 반탁학생이 서너 명이고 친탁학생도 숨어서 노출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역시 서너 명으로 추측되었다. 광주고보와 서중 출신의 교사들은 정치에 가담하지 말라는 충고라고 할까, 학교 방침을 학생들에게 열심히 설득했다.

그러던 중 반탁학생들이 반탁운동의 정치집회에 참가했고, 훈육주임과 담임 선생님들은 정치집회에 참가한 반탁학생들을 불러서 호되게 나무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했다. 교사들은 정치판의 갈등과 대립에 끼어들어 예기치 않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쓴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반탁학생들을 불러서 나무란 훈육주임과 교사들이 광주경찰서에 구속된 것이다. 순진한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구속된 데 분개하여 경찰서에 달려가 데모를 했다. 구속된 교사들은 좌파로 지목되는 교사도 있었으나 우파로 지목되는 교사도 있었다. 그러니 우파도 좌파도 아닌 전교생이 궐기한 것이다.

당국은 반탁학생들만 빼고 전교생들이 물들었다고 판단했고, 반탁 학생들은 클래스메이트가 아닌 경찰의 앞잡이가 되었다. 수상한 급우가 있으면 교내에서 끌고 가 처형을 가하기도 했다.

석두도 어느 날 붙들려갔다. 석두는 교내신문 <영회(永懷)>의 편집위원인데, ‘영회’라는 한자가 인쇄하면 잘 보이지 않으니 ‘우리 문원’으로 바꾸자고 해서 문예반 지도교수였던 고재기(高在期) 선생을 비롯한 세분의 교사들 허락을 받고 바꾼 것인데 그게 문제가 된 것이다.

이북의 정권과 좌파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동무’라는 어휘는 일찌감치 사라졌지만 ‘우리’라는 어휘도 ‘동무’라는 어휘 다음으로 금단 시 된 것이다. 정말로 어이없다고 생각되었으나 “지도교사들이 좋다고 하셨다.”고 변명을 했다. 지도교사들과 대질을 했다. 학생이 교사와 급우(級友)의 조사관이 된 것이다.

고재기 선생을 뺀 문예반 다른 교사들은 ‘영회’를 ‘우리 문원’으로 바꾼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어떤 사정이 있어서인지 모르나 두 명의 교사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우리 선생님이 거짓말을 한다. 석두는 말할 수 없는 울분과 슬픔을 느꼈다. 문예반의 몇 명은 창고에 끌려가서 얻어맞고 나왔다. 그러나 석두는 얻어맞지 않았다. 조사관인 반탁학생이 소학교 동창이었기 때문이었다.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지만 끌려가 얻어맞는 사람만 손해고 재수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그런 시대요, 분위기였다.

▲ 1944년 광주서중 1학년 때 필자(왼쪽)와 형님(서중 4학년)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시대에 건축된 광주서중의 목조건물이 하룻밤 사이에 타버린 것이다. 이른바 <광주서중 교사 방화사건>이다.

목조건물이니 실화(失火)일수도 있고, 방화(放火)일수도 있지만 당국은 좌파학생들의 방화로 단정하고 좌파로 지목되는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석두의 학년에서도 몇 명 구속되었고 형무소에 다녀왔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교를 불 질러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당국은 좌파 학생들이 방화를 했다고 해서 좌파학생들을 잡아들였다. 그런 낌새를 느낀 일부 좌파학생들은 등교하지 않고 도피했다.

김용구는 전국학생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광주서중 야구부의 유격수였다. 역시 야구부의 투수였던 김양중은 김용구와 같은 1조로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김용구가 연습에 나오지 않고 도피했다.

김양중은 김용구가 빠진 팀으로는 다시 우승을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반탁학생들과 교섭을 했다. 김용구가 연습에 참가하고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동안은 구속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반탁학생의 급우(級友)인 친구들은 좋다고 했다. 그러나 김용구가 연습장에 나오자 그 길로 구속되었다.

소년들의 우정은 여지없이 짓밟힌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약식 재판으로 광주형무소의 죄수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그들이 방화범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만약 그 방화사건이 당국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라면 그 방화를 조작한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막연히 당국에 반감을 갖게 된 것이다.

석두도 좌파의 독서회에 가담했다. 그러나 석두는 반년도 못가서 조직을 이탈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순수한 독서회룰 출발했던 모임이 어느새 남로당의 청년조직으로 변모하고, 신빙성이 없는 내용의 전단과 포스터를 살포 내지는 부착하라는 지령이 내려오자 석두는 그 지령에 따르면 당장 잡혀갈 텐데 우리를 소모품으로 이용하려고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석두는 어느 쪽의 소모품도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석두는 학교를 다니면서 조직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마침 서울상대를 다니는 사촌형님과 의과대학을 다닌 형님이 서울에 있었으므로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석두는 매일같이 소공동의 남대문도서관이나 국립도서관에 아침 일찍 줄을 서서 입장해서 도서관의 문을 닫는 밤 아홉시까지 자리를 지키고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는 틀렸으나 대학에 들어가려면 검정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그러기 이해서는 참고서를 열심히 읽고 혼자서 공부를 해야 했다.

석두는 서울에 올라와서 입정동(笠井洞)에서 네님 플레이트 공장을 하는 사촌형님 집에 기숙하고 있었는데, 형수님은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석하다시피 하며 공부하는 석두를 기특하게 생각해서 도시락을 귀찮아하지 않고 두개씩 싸주었다. 점심과 저녁을 도서관에서 먹고 밤 열시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