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맥회_1 (3회)

1948년 당시의 국립도서관과 남대문도서관은 도서관 원래의 기능은 없고 고등고시나 각종 검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일반인의 열람은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책을 보고 혼자서 공부하는 고시학원과 같았다. 그래서 새벽부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하지 못했다.

어쩌다 늦잠을 자서 늦으면 석두는 도서관 출석을 단념하고 국도극장이나 단성사에 가서 악극이나 가극, 쇼 등을 구경했다. 석두는 광주서중 2학년과 3학년 때도 교칙을 어기고 자주 극장에 갔다. 극장은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황홀한 세계였다.

석두는 중학교 5학년 중 6개월 동안 말하자면 ‘도서관 독학 고시학원’ 출석으로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중앙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다. 중앙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한 것은 일제시대 소학교 6년, 중학교 2년의 8년 교육에서 우리의 한글이나 문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너무나 무지하다고 생각해서 국문과를 선택한 것이고, 중앙대학을 선택한 것은 중앙대학에 한국 시조 연구서적을 낸 신영철 교수가 있었고, 시인 김기림 교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의 혼란기 속에서 학구열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도서관에 들어가려고 줄을 섰고 원남동이나 인사동의 고서점에는 언제나 독서광들로 붐볐다. 우리말 서적은 거의 없었지만 일본인 교사나 교수들이 귀국하면서 두고 간 전문 서적이 많았다.

석두는 중앙대학교 국문과의 강의를 열심히 듣고 부전공으로 영문과 강의를 들으면서 그런대로 대학생활에 길들여갔다. 중학생은 머리를 기를 수 없는데, 대학생은 머리를 기를 수 있었다. 석두는 중학생과 대학생 이주이 신분이라 머리를 기른 채 광주에 내려갔다. 루문동에서 본정통(本町通)으로 이어지는 길을 석두는 6개월간 기른 장발을 휘날리고 거들대며 올라갔다.

마침 훈육 주임이 김문상(金紋常) 선생이 자전거를 타고 본정통을 내려오다 장발을 하고 거들대며 올라오는 석두를 만났다. 김문상 선생은 문예반 지도교사를 하신 적도 있고 해서 석두를 잘 알았다. 석두는 광주서중을 관두고 중앙대학 다니는 중이라고 했으나 김문상 선생은 석두를 막무가내로 이발관에 끌고 가서 머리를 깎게 했다.

이제 반년만 다니면 졸업인데 무슨 소리냐, 중앙대학에 적은 그대로 두더라도 광주서중을 졸업하는 것은 대학 졸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중학교 동창이나 동문이 사회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고 설득해서 석두의 머리를 깎게 하고 내일부터 당장 등교하라고 했다. 머리 깍은 사연을 석두로부터 자세히 들은 석두 어머니도 김문상 선생의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 내일부터 당장 서중에 등교하라고 했다.

6개월이나 결석했다가 등교하는 것이 껄끄러웠으나 급우들은 반가워했다. 왜 그동안 장기결석 했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세상이 하도 시끄러우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 묻지 않는 것이다. 혼란기였지만 그 대신 관대했다. 장기결석을 하고도 졸업을 할 수 있었으니, 혼란기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1949년 6학년 2학기의 교실 분위기는 5학년 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대학 입시가 내년 3월, 목전에 다가왔다. 그러나 반탁학생도 그렇지 않은 학생도 급해졌다. 정치적 관심은 뒷전으로 가고 입학시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반목(反目)도 휴전에 들어간 듯 했다. 그러나 3조의 장태규, 2조의 소민, 걸탄, 서홍, 그리고 석두 다섯 명은 그러한 가열된 입시 준비 분위기에 따르지 않고 전남여중(全南女中)의 5학년 여학생 정호, 최은례, 양옥주, 손영희 등 네 명과 어울려서 일제시대 이태준, 정지용, 이무용, 김기림 등이 중심이 된 구인회(九人會)를 본떠서 구맥회(九麥會)를 만들어 자주 만났다.

▲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구맥회 회원 중에서 죽거나 실종된 세 사람을 빼고 살아남은 친구들 / 왼쪽 뒤부터 시계뱡향으로 필자, 김호종, 문숙영, 장태규, 정시년. 생존자 중 한명은 사진에서 빠졌다. 아홉 명의 회원 중 자신들만 살아남았다는 자책 등이 겹쳐 구맥의 파편'이란 문구가 선명하다

입학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는 급우(級友)들의 눈에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6학년 졸업의 마지막 학기에 6학년 전원이 여수로 해서 소록도로 돌아오는 여행을 했다. 그때는 여순반란사건 직후라 여수의 중심부는 많이 파괴되어 폐허에 가까웠고 그 상처 입은 거리에 바라크(baraque, 막사)가건물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그 바라크 중 한 건물이 다방이었다.

반란사건의 전투현장, 페허에 세워진 이른바 ‘하꼬방’의 가건물인 다방은 쓸쓸해 보였지만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석두는 구맥회 친구들과 어울려서 아직도 반란사건의 상처가 여물지 않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은 ‘하꼬방’의 다방에 들어갔다. 다방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다른 손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석두는 그 여인을 ‘레지’로 착각했다. 그 시대에는 다방의 여종업원을 ‘레지’라고 불렀다. 아마 ‘레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모르지만 ‘레지’라고 했다.

“저...... 우리 차 좀 주시겠어요?”

석두가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여기 손님인데요.”

석두는 다방손님을 레지로 착각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석두는 당황했다.

그러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 레지는 곧 나올 거예요. 학생들은 다방에 처음 와본 모양이지.......”

“네. 저희들은 졸업반 수학여행 왔다가 처음 왔습니다.”

장태규가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가 훈육주임에게 들킨 듯이 변명조로 말했다.

“그런 줄 알았어요. 같이 앉아도 돼요?‘

여인은 자리를 옯겨 앉았다.

여인은 여수여고의 박금옥(朴金玉) 교사였다. 석두는 박 선생님이 보통 똑똑한 선생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박 선생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여수에 왔으면 오동도에 가서 동백꽃도 보고 바다에 떠오르는 햇님도 봐야지요.”

박금옥 선생은 내일 아침 일찍 만나서 여수의 명승지 오동도를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모두 찬성하고 박금옥 선생에게 감사하다는 경의를 표했다.

숙소에 돌아오자 인솔 교사에게 내일 새벽 오동도에 갔다 오겠다고 보고하고 허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