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막 쏟아진 후 해가 뜨면서 파란 하늘에 무지개가 살짝 떠오른다.
하늘 속에서 신비스럽게 피어난 아름다운 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릴 때 무지개를 바라보며 신비의 나라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곱던 무지개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음이 공허하다.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지만 다시는 그려지지 않는다.
의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수련, 결혼, 출산, 육아, 진료, 연구, 해외 연수, 주부, 시댁, 친정…. 머리가 복잡해지고 어느 것 하나 정리되지 않은 채 날마다 허둥대지만 늘 시간이 부족하다. 앞만 보고 달려왔다. 하얀 백색광에서 일곱 가지 빛을 만들어 내는 무지개가 나의 인생을 말해주는 듯하다.
의대 철학 시간에 김형석 교수는 의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기 전에 신학과 철학을 알고 의학에 접근하라고 말씀하셨다. 의사이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어느덧 고희가 넘어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인생을 잘 살아왔는가? 의사 생활은 잘했는가? 엄마 노릇은? 아내 역할은? 며느리와 딸 노릇은?
이제 할머니 역할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인생 중반에 시작된, 공인으로서 사회 활동은 잘하였는가? 나의 인생이 백색광에서 무지개 색으로 채색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어느덧 고희가 넘어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어
인생이 백색광에서 무지개색으로 채색되어지고
빨주노초파남보를 다 겪은 후 마지막에 다는 훈장 같은 이름 할머니"
얼마 전 이른 아침에 꽃 배달이 왔다. “띵동!” 벨이 울리더니 “꽃 배 달이요!” 한다. 꾸물거리다 조금 늦게 문을 여니 “할머니! 얼마나 벨을 눌렸는데 왜 이리 늦게 나오세요?” 하고 배달원이 나를 질책하였다. 그런데 그 배달원은 머리가 하얀 젊은 할아버지였다.
순간 난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란 호칭은 손주들한테서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맞아! 할머니는 할머니지….’ 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나는 어떤 호칭을 갖고 살아왔나? 아가씨, 아줌마, 선경 엄마, Dr. Kim, 원장님, 회장님, 고문님, 박사님 등이다. 갓 결혼 후, 아가씨로 불리다 아줌마라는 소리를 듣고는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 하고 실망했었는데 이젠 “할머니!” 하는 소리에 서운해 하고 있다.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까.
의과 대학 시절 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몇몇 친구들과 함께 토론도 해 보고 수업을 빼먹고 숙녀다방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지인께 “어떻게 살면 잘 살 수 있을까요?” 하고 물어보았지만 뾰족한 답은 없었고 “살아가노라면 해답이 나올 거야.”라는 조언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많은 의미가 있는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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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上 )한국여의사회 회장 취임식 때 건배하고 있다 / (下)비엔나 세계여자의사학술대회에서 케냐 여의사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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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세월은 많이 흐른 것 같은데 잠시 낮잠을 자고 난 기분이다. 분명 백지의 인생에 수많은 색칠을 하여 한 장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닌 듯하다. 이 세상을 하직하면 한 장의 그림이 되고 어느 색깔이 가장 선명한지 무지개 속에 나타나겠지.
의사가 된 후 힘들었던 수련 과정을 마치고 혈액 전공 전문의로 생과 사를 넘나들던 환자를 진료하였다. 인생을 배우고 죽음을 가까이 보면서 한층 더 성숙된 의사의 길을 가고 있다. 영원히 뗄 수 없는 엄마라는 명찰도 나는 참 행복하다.
지금 네 자녀 모두가 결혼하여 사위, 며느리까지 8명이 부르는 ‘어머니’라는 단어, 참 정겹고 따뜻하다. 8명의 손주가 불러대는 “할머니!”라는 소리에 힘이 나고 농사를 잘 지은 농부의 심정이다. 참 행복하고 명예로운 이름이다.
속상하고 화가 나면 아이 들을 책망하기보다 마음을 비우고 내 아이의 그릇 크기를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너희들의 인생은 너희가 책임져라.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까지 등록금은 주지만, 공부하지 않으면 그만두어라. 더는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자녀를 방목한 듯했지만, 원거리에서 조종했다고 고백하고 싶다.
부모의 마음을 알았는지 쌍둥이 아들은 심장내과 교수가 되어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자녀와 각을 세우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다시 학부모가 되라면 사양하겠다. 그러나 손주들에게는 한없는 아량이 생긴다. 모든 것이 용서되고 예쁘기만 하다. 옛말이 틀린 것은 없다. 내리사랑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고부간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맞부딪치면 안 된다. 살짝 비켜나가야 한다. 그 갈등은 평생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딸과는 싸울 수도 있고 야단도 치고 소리도 낼 수 있다. 그러나 고부간은 가능한 예의를 지키고 서로 존중해야 평생 정감 있게 지낼 수 있다. 물론 사위도 마찬가지. 폭포와 강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르듯 부모는 항상 내리사랑을 줄 수밖에 없다.
공인으로서 단체의 리더는 마음을 내려놓고 보듬어야 한다. 막상 수년간 단체의 회장직을 맡으며 비록 나와 다른 생각, 성격의 문제가 있어도 따뜻한 소통이 있으면 협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각을 세우면 사람을 잃어버린다. 리더는 돈에 자유로워야 한다. 돈과 연결되면 결국 노예가 되어 마지막에는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나의 70년 인생은 건강하게 ‘앞만 보고 걸었노라.’고 할 수 있지만 이제 80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면서 걸어갈지, 뛰어갈지, 쉬어갈지 아니면 중도하차 할지 모른다. 천천히 쉬엄쉬엄 산천을 구경하며 옆 지기와 함께 잘 걸어가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우리네 인생도 신비스럽게 탄생한 무지개처럼 잠시 아름답게 그려졌다 언젠가는 불현듯 사라져버릴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란 호칭은 그냥 붙여지지 않는다. 인생의 빨주노초파남보를 다 겪은 후 마지막에 다는 훈장 같은 이름이다. 할머니 다음의 호칭은 있는가? 그 마지막 훈장을 받았으니 난 행복한 인생의 승리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