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울 오빠 (9화)

지나온 세월은 하나하나 영상이 되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는 대구에서 좀 떨어진 약목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난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내가 3살 때 의사이신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 당시 33세이신 어머니, 요즘 같으면 결혼도 하지 않을 나이에 삼 남매를 두었으니 얼마나 황망하였을까?

소복단장 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 어머니는 오직 삼 남매를 위해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올 법한 한 여인의 억센 삶의 여정을 지난 세월 나는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제 엄마는 이 세상에 없다. 엄마의 일생을 잠시나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어느덧 고희를 맞이하며 저물어 가는 인생의 들녘에 서게 되었다.

울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키우면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늘 긴장한 상태에서 슬픔과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묻어버리고 용기와 희망을 품고 오직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오신 것 같다.

엄마의 가장 큰 희망은 서울대 치대에 다녔던 오빠가 일기 쓰듯 매일 보내온 편지였다. ‘어머님 전 상서’로 시작하여 ‘조금만 참고 견디시면 제가 곧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리겠다.’는 글귀였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기다리던 오빠의 편지를 뜯어보는 것은 엄마, 언니 그리고 나의 크나큰 낙이었다.

그 당시 언니는 서울에서 오빠보다 먼저 대학을 마치고 내가 졸업한 대구 여중에 교사로 재직하였다. 언니 역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엄마에게 용기를 주었다. 나는 착하고 마음씨 고운 언니의 진가를 지금에야 깨닫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형부 역시 서울법대를 나온 대학교수이다. 법을 공부한 분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법 없이 살 수 있는 분’이라고 가족들은 농담한다. 항상 무게 있는 삶의 모습에 우리 가족은 든든한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가장 큰 희망은 서울대 치대에 다녔던 오빠

오빠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언젠가는 모든 식구가 다시 만나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엄마는 늘 베풀면서 살라고 하셨다. 택시를 타면 기사에게 “90세 할머니가 주는 선물이니 받으시오.”라고 항상 팁을 주셨다. 아파트 경비, 청소 아줌마, 도우미 등 모든 분을 일일이 챙기셨다. 소소한 마음의 정을 나누는 일은 엄마의 몸에 배었다.

“상대방 처지를 생각하고 말을 하라.” “침묵은 금이다.” 늘 잔소리같이 하신 말씀은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은 교육을 받은 엄마도 아니고 사회 경험이 많은 지도자도 아닌 우리 엄마는 마음 저 바닥에 깔린 철학이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엄마의 따스한 깊고 깊은 마음의 교육을 먹고 자란 것이다.

의과대학 4학년 때 공부하는 클럽 모임이 있다고 하니 엄마는 “누구 집 아들인지는 모르나 귀한 아들이니…” 하고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준비해 주셨다. 그때 그 도시락을 먹은 주인공은 바로 의사 국가고시 시험을 위해 같이 공부한 지금의 남편이다.

사위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 주신 엄마였다. 어쩌면 사위가 될 줄 예측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남편은 그때 그 도시락의 닭조림이 그렇게도 맛있었다고 하며 엄마의 음식을 그리워한다.

▲ 필자가 중앙대 의대 박사학위 받을 때. 우리 3남매, 오빠와 친언니와 함께

엄마 인생의 종착역을 앞두고, 상상도 못했던 오빠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것도 어이없는 교통사고이니. 평생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아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가슴은 찢어지고 메말랐던 눈물이 매일 다시 솟구쳐 울고 또 울었다.

물건을 샀다면 다시 바꿀 수 있다. 외국 여행을 갔다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면 된다. 군대에 입대했다면 제대할 날을 기다리면 된다. 날마다 보던 아들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영원히 볼 수 없는 먼 길로 갔으니 어찌 엄마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난 ‘오빠가 외국에 유학 갔다.’고 생각했다가 ‘저 하늘나라로 잠시 여행 간 거야, 조금 있으면 만날 거야.’라고 스스로 위로 했다. 오빠가 퇴근해 집에 오면 엄마 방을 먼저 들여다보면서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오빠는 영영 보이지 않고 그렇게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마는 97세로 이 세상을 떠나 오빠 곁으로 갔다. 지금쯤 아들에게 따끈따끈한 국물과 맛있는 반찬 만들어 주고 있으리라.

지금도 치과 진료실을 지키고 있는 올케는 한마디 유언도 없이 가버린 오빠가 그렇게도 원망스럽고 야속하다고 한다. 이 다음에 만나면 올케는 물어볼 것도 궁금한 것도 많다고 한다.

그날 오빠는 대학동기 골프모임에 참석하였으나 눈이 내려 운동이 취소되었다. 눈이 오면 회원들은 운동하러 오지 말라는 골프 클럽 측의 고지가 있었다면 사고는 나지 않았겠지? 눈이 그친 뒤 천천히 돌아와도 되는데 왜 그리 급히 돌아왔을까? 또한 본인이 운전하지 않고 왜 대학 동기가 운전하는 차에 탑승하여 변을 당했을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날 미끄러운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났지만, 운전자는 살고 오빠는 결국 떠나 버렸다. 뉴스에서는 분명 ‘36중 추돌사고로 김광남 서울치대 학장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장례식 전날 밤, 보험회사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김광남 씨는 자살했기 때문에 보험료를 지급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온 가족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고 그 사건을 바로 잡는데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결국 교통사고 보상금은 치과대학에 전달되어 ‘김광남장학금’으로 후학을 돕고 있다.

같이 간 친구들이 오빠를 찾아 고속도로 주위를 찾아다니다 도로 아래 개울가에 누워 있는 오빠를 찾았다고 한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창문을 열고 아픈 가슴을 잡고 밖으로 나갔을까? 가슴에는 안전띠 자국, 폐에는 온통 출혈이 되어 있었다.

호흡이 되지 않아 답답해서 차 밖으로 나간 것은 나중에 부검을 통해 증명되었지만, 오빠는 말이 없었다.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사회에는 억울하게 갑과 을이 바뀐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은 연극을 하고.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오늘도 넘쳐나겠지. 세월은 흘러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미드라쉬(Midrash)에 나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랜터 윌슨 스미스(Lanta Wilson Smith)가 남긴 글이 생각난다.

슬픔을 이기고 굳건히 치과병원을 지키는 올케는 삼 남매를 모두 결혼시키고 잘 지내고 있다. 올케는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아직도 지울 수 없는 그날의 상처는 우리 가족들에게 뼈를 녹이는 아픔이 되었다.

언젠가는 모든 식구가 다시 만나, 그토록 풀리지 않았던 궁금증도 풀고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