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주신 마음의 유산 (10화...

삶과 죽음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한 달 전만 해도 어머니와 대화를 하였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는 대답이 없다.

아침에 병원 출근하기 전, 어머니를 보기 위해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간다. 병실로 올라가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네가 보고 싶었어.” 하고 나의 손을 꼭 잡고 볼에 갖다 댄다. “매일 보는 딸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며 너스레를 떨면서 가져온 요구르트 한 모금 드시게 하고 체리, 멜론 한 조각 입에 넣어 드리고는 “나 일하러 가야 해.” 하고 종종걸음으로 나온다. 어머니는 빨리 가라고 손을 저으면서 아기처럼 ‘안녕’을 한다.

매일 아침 엄마를 보러 요양 병원으로 출근한 것이 어느덧 7개월이 되었다. 아침에 회의가 있어 어머니 얼굴 못 보면 궁금하여 저녁에라도 들러야 안심이 되었다. 이웃에 사는 가족들과 증손주들은 왕할머니를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재롱을 부린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일주 전부터 음식 삼키는 것을 싫어하고 사레가 들어 기침을 하셨다. 차츰 요구르트 한 모금도 과일도 삼키지 못하셨다. 그러나 기억력과 정신은 말짱하여 치매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였다.

6년 전 치과 의사인 친손자 종걸이가 치아 8개를 심어 드려서인지 다른 노인들보다 훨씬 젊고 고와 보였다. 씹는 데는 지장이 없어 딱딱한 강정도 잘 드셨다. 처음에 우리는 90세 노인에게 치아이식 수술을 한다니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하였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불편 없이 잘 지내셨다. 조카는 할머니 수술하다 잘못되어도 고모가 설마 나를 고소하겠어? 하며 안심하고 시술하였다고 한다.

97세를 일기로 편안하게 주무시듯 이 세상과 이별한 어머니

물질적인 유산보다 집안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유산을 남기셨다

천년만년 사실 것 같던 어머니가 이제 삼키는 근육이 마비되어 음식이 기도로 들어가 흡인성 폐렴이 온 것이다. 청진기로 들어보니 양측 폐에 그르럭 그르럭 잡소리가 들렸다. 얼른 항생제를 투약했지만, 호전되지 않아 결국 혈관으로 주입하면서 가래를 빼내려고 호스를 꽂았다.

상태는 악화되어 밤늦게 호흡 곤란이 와서 산소를 흡입시키며 겨우 한고비를 넘겼다. 급기야 종걸이가 달려와 “할머니! 가지 마! 증손자보고 가.” 하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쏟았다. 손주들을 키우고 뒷바라지해준 할머니에게 그동안 잘 해드리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서울치대 학장이었던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잃고 수년간 실의에 빠졌던 어머니, 그러나 아버지 대신 할머니 용돈까지 챙기던 손자를 퍽 기특해하셨다.

지병이 없던 어머니이시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꺼져가는 등불 같았다. 산소 포화량 수치는 80%, 70%…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모두 모여 할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산소포화량이 60% 될 때쯤 증손자가 태어났다는 전화가 왔다.

8월 16일 1시 30분 “할머니! 그렇게 바라던 증손자 태어났어.” 하고 종걸이는 자기 아들 얼굴이 있는 아이패드를 할머니 얼굴에 들이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보는 듯 하더니 다시 눈을 감으셨다.

불교에 입문하여 반야심경, 금강경 등에 관한 많은 공부를 하신 어머니이지만 항상 “종교는 자유다.” “어떤 종교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라고 하시면서 기독교 신자인 집안 식구들에게 종교에 대한 언급은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죽고 나면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 어머니 팔순 때 / 좌로부터 언니, 형부, 오빠, 엄마, 올케, 필자 부부

워낙 자존심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한 어른이라 평생을 살아오신 길에 혹 오점이라도 남길까 두려워 아무도 같이 교회에 가자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용기를 낸 나의 둘째 딸은 꺼져가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외삼촌도 만나고 천국에 가셔야지요.” “할머니가 허락하시면 제 손을 꼭 잡으세요.” 하면서 기독교 입문을 위한 설득에 나섰다.

그때 어머니는 “외삼촌”이라는 말에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손녀의 손을 꼭꼭 두 번을 잡고 예수님 영접을 허락하셨다. 급기야 올케는 목사님께 세례를 요청하여 어머니는 그렇게 바라던 증손자도 보시고 세례도 받았다. 산소 포화량은 점점 떨어져 50%, 40%…가 되고 어머니는 97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주무시듯 인생의 숙제를 끝내신 것이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이며 유독 모성애를 많이 가지신 분이다. 또 정신적인 유산을 무한정 주고 가신 분이다. 의사이신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날 어머니는 남겨둔 삼 남매를 훌륭히 키우겠다는 맹세를 하셨다고 한다. 늘 자식 교육을 위해 정신적인 무장을 하고 일구월심 자식을 위해 살아오셨다. 우리에게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항상 “겸손하라.” “남에게 베풀어라.” “말을 아껴라.”라고 당부하셨다.

집안의 친척들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모두 어머니께 상담하고 부탁도 하였다. 이종사촌 언니와 외사촌 오빠도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간디스토마로 고생하신 외삼촌을 돌봐드리고, 외할아버지도 보살피다가 하늘나라로 보내셨다. 큰집 언니들이 시집갈 때면 어머니가 이바지 음식부터 예단 준비까지 사돈댁에 책잡히지 않게 준비해 주셨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 글 쓰는 필체며 모든 면에 지혜로운 ‘치과 할머니’로 통하곤 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조카들까지 공부시킨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머니는 대단하셨다. 집안의 친척들은 그동안 받았던 따뜻한 사랑을 되새기며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말을 쏟아놓았다.

한학자 집안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던 어머니는 외삼촌이 독립운동으로 갇히는 바람에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였다.

만파(萬波) 외할아버지가 수묵화를 그리고 한시를 지어주시면 비단 천에 옮겨 그대로 전통 한국 자수로 수를 놓았다. 수저 집 뚜껑은 빨간색 비단에 하얀 보름달이 은은히 구름에 가려있고 그 사이로 까만 새들이 줄을 이어 날아가며 초서체로 쓴 할아버지의 한시에 수를 놓아 운치를 더해 준다. 그 아래 몸통은 하얀 학이 한쪽 다리를 들고 소나무 가지에서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갖가지 비단 실로 수를 놓은 이 자그마한 수저 집을 좋아하지만, 외할아버지의 작품들과 함께 올케가 소장하고 있다. 매, 난, 국, 죽으로 수를 놓은 상보, 수묵화 병풍과 족자, 시첩 등 그 외 작품도 이제는 가보로 아끼게 되었다. 11명의 손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사랑을 기억할 것이고 19명의 증손주들도 존경심을 가질 것이다.

어머니는 물질적인 유산 보다 집안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유산을 남기셨다. 항상 “종교는 자유다.”라며 불교, 기독교를 다 인정하셨지만, 어머니는 결국, 그렇게도 아끼던 아들을 보기 위해서인지 마지막에는 기독교에 입문하셨다. 천국에서 성경 공부를 새로 시작하시며 행복하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