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야기 (11화)
  제2장 마음의 유산

우리 가족의 가장 아픈 상처는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이다.

1998년 11월 22일 아침, 오빠의 동기인 모 치과대학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우리 오빠가 허리를 조금 다쳐 옮기는 중이라고 했다. 그 후 20분이 지나 다시 전화가 오기를 음성에 있는 보건소에서 엑스선을 찍고 있는데 결과가 나오면 알려 주겠다고 한다. 조금 후,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며 기다려보라고 했다. 얼마 있다가, 이젠 의식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오빠는 서울치대 학장으로 계시면서 동기 골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나갔다. 추운 날씨에 첫눈이 많이 와서 고속도로는 빙판길이 되었고 골프장은 눈으로 뒤덮여 취소되었다고 한다. 

차 한 잔 나누고 되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는 사방이 안개에 싸여 있었고 살얼음 덮인 도로는 그야말로 거울 같은 빙판길이었다고 한다. 모든 차량이 거북이 운행을 하면서 안전거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휴게소에 들렀다가 오빠는 친구인 모 치대교수 옆 자리 조수석에 앉게 되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오빠의 죽음
보험사에 의해 자살이라는 오명을 쓰고 천추의 한을 남길 뻔
인정 많고 따뜻한 오빠였는데 이제 더는 만날 수가 없게 돼


친구는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미끄러운 길 위에서 앞차와 충돌하였다. 그 당시 뉴스 보도로는 36중 추돌이 일어나 서울치대 김광남 학장이 사망하였다고 했다. 운전자는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면서 에어백이 터지고 옆 좌석에 앉은 오빠는 앞차와 부딪힌 충격으로 가슴이 답답하였는지 차 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오른쪽 차 모서리는 심하게 망가졌으며 앞에 있던 봉고차 뒷좌석에 앉았던 기사의 가족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그날 같이 간 오빠 친구 일행은 없어진 오빠를 찾으러 안개 속에서 헤매고 다녔는데 한참 후 고속도로 아래 개울가에 누워 있는 오빠를 찾았다고 한다. 고속도로 옆에는 개울로 내려갈 수 있는 좁은 길이 있었다. 고속도로는 꽉 막혀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에서 구급차를 간신히 불러 이송하였다. 그때 다른 친구는 구급차에 타지 못하게 하고 오빠와 함께한 그 교수 친구 혼자 동승하여 서울과 반대 방향인 음성 쪽으로 향하게 한 것이었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오빠의 상태를 혼자서 판단하고 우리에게 계속 전화해 준 것이었다. 우리는 몹시 당황하여 사방에 전화를 걸어 헬리콥터를 출동시켰다. 그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서울에 온 관계로 한강을 넘을 수가 없다고 하여 한강 둔치에 헬리콥터는 도착하였다.

그때가 12시 30분, 사고 4시간 만에 오빠는 응급조치 한 번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올케언니도 같은 치대 동기생이라 경찰이 와서 사고를 낸 동기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느냐고 하자, 사람은 이미 갔고 친구를 어떻게 구속시키겠느냐, 불구속 처리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서울 치과대학 장으로 장례식을 치른다고 하여 준비하고 있는데 장례식 전날 밤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김광남 학장은 교통사고가 아니라 자살이니 보험처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시간이 갈수록 의문점은 더해가고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36중 추돌이 일어났고 에어백이 터진 운전자는 살고, 자동차의 옆 좌석에는 아예 에어백이 없는 상태였다. 사고 차의 앞부분은 망가져 국립과학 수사연구소로 끌고 갔고 오빠는 사망했는데 왜 자살이라는 건지,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고 무엇을 의논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필자가 초등생 시절 고등학생인 오빠와 대구의 명동거리를 걷고 있다
 
먼저 우리는 음성보건소에서 찍은 엑스선을 분석하였다. 흉부 엑스선을 보니 흉곽내출혈과 함께 좌측 늑골이 거의 다 골절되었고 좌측 기관지에도 골절소견이 보였으며 허리뼈에도 압축 골절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수많은 참고 문헌과 자료를 수집하여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의견을 나눈 결과 안전띠에 의한 심한 충격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살이라는 결론은 수긍할 수가 없어 수사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워낙 의문점이 많고 중대한 사안이라 초동수사부터 다시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경찰대학 출신 엘리트 경찰관이 담당하여 과학적으로 꼼꼼히 수사를 다시 시작하였다. 자살로 결론이 나면 보험회사는 보상하지 않아도 되고 운전자는 처벌받지 않으니 그들에겐 얼마나 좋은 결과인가? 진실을 말해 줄 오빠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우리는 화가 났다. 소위 최고의 학식을 가진 사람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사실과 이 사회의 비열함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경찰에서 검찰로 수사가 넘어가게 되었다.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한 것은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하라는 검찰의 명이 떨어졌다. 온 가족은 매일 눈물로 지새웠다. 꽁꽁 얼어붙은 12월의 엄동설한에 차디찬 땅속에서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누워있는 오빠를 다시 파헤쳐 부검한다니…. 그러나 가당치도 않은 현실도 현실이었다. 

나와 남편, 오빠의 사위는 의사다. 사인을 꼭 밝히는 것은 의사 가족인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결과는 우리가 짐작한 대로 가슴에는 안전띠 자국의 피멍이 새까맣게 남아있었고 좌측 늑골은 거의 다 골절되었으며 가슴 속에는 혈액이 가득 차 질식으로 사망하였다. 허리뼈의 압박 골절 역시 충격에 의해서도 볼 수 있는 사안으로 결국 교통사고로 판명이 났다. 자동차의 파괴된 정도로 보아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결론이 났다. 

자살이라는 오명을 쓰고 천추의 한을 남기고 묻혀 버릴 뻔한 사건이었다.

2년 동안 우리 가족은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헤매고 다녀야 했으며 진실을 밝히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지 모른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오빠의 친구가 반성의 기미도 없이 그 당시 84세 노모가 있는 우리 친정에 사과 한번 하지 않은 채 택배로 오빠의 골프채만 보낸 것이었다.

그 후 세월은 흘러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픈 가슴을 안고 날마다 기도와 눈물로 보내던 올케는 보상금의 절반을 ‘고 김광남 장학금’으로 치과대학에 기부하여 지금까지 치과대학생들이 해마다 혜택을 받고 있다. 지금도 치과대학 학장님과 교수님들은 영락 동산 추모식 때 꼭 참석하신다.

나의 오빠는 나와 6살 차이로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에게는 따뜻한 오라버니였다. 오빠가 고등학교 때 가정교사를 하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를 자전거에 태워 가정교사 하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동생이라고 자랑하고 선물을 가득 받아왔다. 한복을 곱게 입은 내가 고등학교 모자를 쓴 오빠의 손을 잡고 대구의 명동 길을 걷고 있는 스냅 사진이 아직도 그때의 추억을 말해주고 있다.

오빠는 효자였다. 서울치대 재학시절 하루가 멀다고 홀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어머님 전 상서’로 시작하여 조금만 참으시면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임기 2년을 마치고 재임된 오빠는 공인으로서 후학양성과 학회뿐 아니라 치과 대학발전을 위해 병원 부지 설정 등 많은 공적인 일을 하였다고 치과계 후학들이 오빠를 아쉬워하며 이야기한다. 

든든한 아들, 믿음직한 남편, 자상한 아빠로서 인정 많고 따뜻한 오빠였는데 이제 더는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스베덴 보리의 《위대한 선물》을 읽고 많은 위안을 받았다. 분명 우리 오빠는 천국에서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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