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화 내과의 첫 단추
하루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제는 구급차 대신 드론으로 환자를 이송하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암은 정복되어 한낱 감기 정도로 여겨지는 시대가 올 것 같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100세가 될 것이다. 내가 의사를 하는 동안 과연 이런 세상을 볼 수 있을까?
국립의료원에서 혈액 종양내과를 전공하던 나는 날마다 혈액암 환자를 진료했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는 모습만으로도 암 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80년대에는 암이라고 진단받으면 사형선고로 생각했다.
환자 몰래 보호자와 대화하며 예후를 설명하곤 했다. 암은 완치가 어렵다지만, 상태에 따라 다르니 최선을 다 해 보자고. 그러나 환자에게는 희망을 주기 위해 태연하게 말했다.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치료주기가 거듭될수록 환자는 머리가 빠지고 입술이 터지고 혈액세포는 줄어들면서 생사를 넘나든다. 보호자도 아프고 나도 아파한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신약을 기다리며 기존 복합치료 주기는 거듭되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지내다 보니 미래도
희망도 일상의 즐거움도 점점 희미해져...
이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어졌다.
희망을 품고 따라주는 환자에게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기도 하고 천사가 되기도 했다. 그토록 간절히 살고자 애쓰는 환자와 함께 울고 웃으며 수년을 지내다 마지막 벼랑 끝에 서게 되면 ‘이제 무얼 더 해 주지?’ 하는 마음에 허탈해졌다. 아픈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써 웃어가며 환자를 위로하였다.
9년이라는 세월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내던 나는 감정 없는 냉혈동물이 된 듯했고 ‘죽음’이라는 단어는 아주 익숙한 친구 같았다. 나와 같은 분야의 교수는 가운 주머니에 묵주를 넣고 기도하며 회진을 했다. 또 다른 교수는 환자 한 명이 떠나면 기도실에 들어가 조용히 환자를 위해 기도했다.
어느 날 오라버니는 “공직에 같이 있는 것보다 개원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 하고 제안했다. 남편이 심장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지만 나는 혈액 종양내과가 내 평생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개원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덴마크, 독일에서 받은 수련과 연구한 논문은 나를 더욱 숙련된 전문의로 인정받게 하였다. 사실 4명의 자녀를 공부시키는데 점점 많은 비용이 들어갈 시기였다.
현미경 보는 것이 좋아 혈액종양내과를 선택하였지만, 차츰 고민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지내다 보니 미래도 희망도 일상의 즐거움도 점점 희미해지고 우울해졌다. 이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학문적인 자산을 버리자니 허탈하고 병원에 대한 도리도 아닌 것 같아 괴로웠다.
때마침 준공 허가가 내려지지 않은 건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이 지금의 ‘김화내과’이다. ‘수개월 후에나 개원할 수 있겠지. 그동안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하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달도 안 되어 빨리 개원하라는 연락이 왔다. 개원의 준비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결정을 해야 했다.
공무원의 박봉으로 4명의 자녀를 뒷바라지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어 이 기회에 개원가로 날아갈까? 고심 끝에 용기를 내었다. 내과 과장님, 원장님께 말씀드렸더니 독일에 유학하고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환자 진료를 걱정하면서 단박에 반대하셨다.
나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 종양 환자들과 괴로운 나날을 이제는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개원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원장님은 공무원 신분이니 김화숙이라는 이름은 달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셨다.
‘김화의원? 김숙의원?…’ 고심 끝에 ‘김화의원’으로 결정하였다. 마침 김OO 선생님이 김화의원 개설을 도와주셨다. 국립의료원에 입원시킨 환자와 외래환자를 지속해서 진료하면서 6개월 동안 나는 개원의 세계를 맛보았다. 결국 김화내과로 간판을 올리고 나는 개원가로 정식 입문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의 판단이 나의 의사 인생을 바꾼 것이다.
언젠가 선배님이 ‘귀빈실에 들어가서 진료할 때 떨림 없이 소신껏 진찰할 수 있으면 그때가 개원할 때다.’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국립의료원에서 14년 동안 활발하게 기계처럼 연마된 나의 몸과 마음은 학구적인 열정과 환자 진료에 몰입하고 있었다.
막상 개원이라는 결정을 하고 나니 망망대해에 혼자 노를 저어가는 뱃사공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환자가 오면 나 혼자서 진단과 치료를 해야 하고 입원실이 없으니 외래에서 해결해야 했다. ‘살롱 같은 진료실’을 꿈꾸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교수의 꿈은 마음 한구석에 미련으로 남았다. 김화의원을 찾아오는 환자와의 만남이 즐거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사로서 보람과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환자의 진료, 약품 관리, 결제, 직원 채용, 의료보험 청구, 세무 관리 등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나의 책임이다. 나 자신은 새로 창업한 사장이 된 기분이었다.
국립의료원에서 내가 보던 환자가 위독하니 회진해 달라는 요청이 오면. 진료실을 접고 달려갔다. 학문에 대한 미련도 있었지만 환자를 지키기 위해 미국의 Attending 진료 시스템을 생각하며 열심히 달려갔다. 어느 날은 교통 체증으로 길에서 반나절을 허비했다. 환자는 호전되고 보람은 있었지만, 언제까지 나 홀로 이 제도를 지켜야 할지 고민하였다. 그러나 진료의 대가도 없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제도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작지만, 정도를 가는 병원’ ‘환자가 나의 진료실을 나갈 때 만족하고 나갈 수 있는 병원’ ‘만약 내 가족이라면 어떤 방향으로 진료할까?’
이런 마음으로 걸어온 세월이 벌써 34년, 이 험한 세상에 사고 없이 30년 이상을 진료하였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그렇게도 바라던 ‘살롱 같은 진료실’에 지금은 소화기 내과를 전공한 큰 며느리가 제2 진료실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나는 지금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의사라는 것과 건강이 나를 지키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의 그릇에 맞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분위기가 있는, 내가 바라던 ‘살롱 같은 진료실’에서 오늘도 하루를 보낸 것을 감사한다. 모든 암이 감기 정도로 여겨지는 날을 기대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