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함께 한 21년 (18화)

38세의 그녀는 깊은 산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21년 동안 나는 주치의로 그녀의 삶을 지켜보았다.

1980년 3월, 17세의 단발머리 소녀는 모 대학 병원에서 류머티즘성 관절염과 막증식성 사구체신염을 진단받고 고열이 소실되지 않아 국립의료원에 1차 입원했다. 이때 좌측 턱 부위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림프샘 종이 만져졌다. 나는 결핵성 림프샘염 또는 림프샘 종양을 의심하며 세포조직검사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비특이성 림프샘염으로 진단되어 즉시 항생제를 투여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 혈액을 포함하여 모든 검사를 시행하여도 혈뇨와 감마글로불린의 상승, 류머티즘성 관절염의 소견 외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고심 끝에 아스피린과 스테로이드제를 투약했다. 고열과 림프샘 종이 사라지고 전신 증상이 호전되어 일단 퇴원시키고 관찰하기로 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병원을 옮겨가며 애지중지 키운 딸이 나을까 기대했지만, 확진은 나오지 않고 증상만 호전되니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3개월이 지날 무렵 소화불량 및 식욕부진으로 2차 입원하게 되었다. B형 간염 항원이 음성이며 간기능수치가 상승하여 A형 간염이 의심되었다. 안정과 수액으로 치료는 잘 되었다.

그해 10월 늦은 밤에 그녀는 고열과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응급실로 내원하였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녀의 부모는 구급차 부르는 것만으론 안심이 안 돼, 우리 집으로 차를 보내 나를 태워가게 하였을까. 그때 그녀의 얼굴은 청색증으로 변해 있었고 간과 비장이 많이 부어 있었다. 비대해진 심장과 심낭에는 물이 차고 부정맥도 있었다. 간수치는 다시 상승하였고 전신 조직에 병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숨이 넘어가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바라보면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생각할 여지없이 ‘우선 환자의 생명부터 구하고 보자’며 다량의 스테로이드제를 혈관으로 투여하였다. 상식적으로 스테로이드제는 부작용이 심해 반드시 투약 지침을 지켜야 한다.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 응급으로 쓸 수 있는 약은 대량의 스테로이드제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정상 호흡을 하면서 전신 증상이 호전되었다. 그녀의 부모는 점점 나에게 의존하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증상이 변화무쌍하니, 나는 자가 면역에 의한 교원성 질환(Collagen Disease)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확진할 수는 없었다. 점차 나는 질병에 대한 호기심과 환자에 대한 애착이 깊어졌고 어떠한 증상이 또 나타날까 유심히 관찰하였다.

1980년 12월 4차 입원을 하였다. 심한 구토로 인해 흡인성 호흡곤란이 와 거의 혼수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 폐 전체에 잡음이 들렸고 부정맥과 폐부종의 증상을 보였으며 의식은 거의 없었다. 기관지 삽입술을 시행하고 폐렴이 동반되지 않게 약물을 투여하면서 기관지 확장을 위한 치료제 등 다양한 약물을 투약했다.

입원 2일째 가까스로 의식상태가 명료해졌다. 기관지의 삽관도 제거하고 전신상태는 호전되었다.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한 상태로 입원하여 의료진들을 긴장하게 하니 도대체 무슨 질환인가 궁금해 외부검사까지 의뢰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나는 더욱 책임감을 느끼며 이 환자에 대해 반드시 진단을 내려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 국립의료원 근무시절 진료를 하고 있는 필자

1981년 3월 나는 남편과 미국 학회에 가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부부가 함께 외국에 나가기가 까다롭고 동시에 여권 발급을 해주지 않는 시절이었다. 남편은 심장학회, 나는 혈액 학회에 가기 위해 초청장을 따로 받았다. 학회에 가는 김에 그녀의 혈액을 드라이 아이스박스에 넣어 미국 세인트루이스 의과대학 병원에 의뢰하러 가겠다고 하니 그녀의 아버지는 반색하며 우리를 공항까지 배웅하였다.

외국 여행은 초행인지라 절차도 몰랐던 우리는 공항 접견실로 안내되고 기내 일등석에 앉았다. 미국 오하이오 병원에 인턴으로 가려다 결혼으로 포기했던 나는 미련과 호기심을 가진 채 미국 LA 공항에 도착하였다. 때마침 그녀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다른 환자의 혈액도 같은 통에 넣어 검색대에서 심사를 받았다.

이상한 통을 발견한 검사원은 “이게 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환자의 병을 진단하기 위한 혈액이라고 내용물을 보여 주며 자세히 설명하고 겨우 통과했다. 그런데 어찌나 신경을 썼던지 혈액을 넣은 통만 갖고, 짐 찾을 생각도 않은 채 밖에 나와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짐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다 나간 뒤에 공항직원은 이름을 부르며 “왜 짐을 찾아가지 않느냐?”면서 가방을 건네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방도 찾지 않고 몸만 빠져나왔던 그 여행을 잊을 수가 없다.

세인트루이스 대학병원에서 시행한 그녀의 혈액검사 결과는 자가면역항체(Anti-RNP) 수치가 1:80으로 나와 ‘혼합성 결합조직 질환(mixed connective tissue disease)’으로 판명되었다. 이 질환은 임상적으로 피부, 관절, 폐, 신경 등 전신에 염증반응이 일어나는 만성자가면역질환이다. 임상 증상과 함께 혈액검사에서 자가면역항체(Anti-RNP)가 양성으로 나오면 이런 진단을 내린다.

자기항체에 의하거나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되나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증상은 대개 관절통, 관절염, 수지의 부기, 손가락 발가락이 찬 공기나 찬물에 노출될 때 하얗거나 파랗게 변화되는 레이노현상과 손에 부종이 흔히 일어나고 근염, 고열, 림프샘염, 각 장기를 전반적으로 침범하는 질환이다.

가슴막염과 심낭염도 올 수 있고 경증 및 중증의 간 비장 증대도 보이며 폐 기능은 감소하고 X-선상 폐간 질의 섬유화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치료는 개인마다 다르며 증상과 침범된 장기에 따라 치료해야 하는데 스테로이드제 효과가 좋고 예후는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당시 함께 검사한 34세 주부도 혈액검사상 자가면역항체(Anti-RNP) 수치가 1:40,560으로 나와 같은 질환으로 판명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해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나는 한국 최초로 이 질환에 대해 내과학회에 보고하였다. 이렇게 확진을 하고 나니 환자를 만날 때마다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고 더욱 자신 있는 진료를 하게 되었다. 앞으로 어떠한 위험한 상태가 되어도 확진된 상태이기에 소상히 보호자에게 설명하며 대처할 수도 있다. 또한 응급상황이 되기 전에 미리 유지요법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국립의료원을 떠나 개원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했고 상태를 계속 지켜보아야 한다. 그녀가 입원하면 나는 다급하게 국립의료원으로 회진을 하러 갔다. 그녀가 숨이 넘어가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바라보면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점점 얼굴은 창백해지고 손가락의 마디마디는 휘어져 변형이 심해지며 다리는 가늘어졌다.

감마 글로불린이 상승하면 호흡 곤란과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전신 증상이 더욱 악화되기에 혈액의 알부민과 글로불린의 균형을 맞추어 주기위해 혈장교환법(Plasmapheresis)을 시행하기로 하였다. 이 기계를 신청해놓고 나는 개원을 하였는데 1년이 지난 후 기계가 들어왔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지속적인 혈장교환 투석을 받았고, 소량의 스테로이드제를 투여하며 치료가 잘 되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발작적인 증상이 나타날 때는 대증요법으로 치료하였다.

그러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것도 모른 채 희망을 안고 미래를 꿈꾸며 산사에 갔다가 그녀는 조용히 이 세상을 하직했다. 아름다운 청춘을 병마와 싸우며,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접어야 했고, 남자 친구가 있어도 미래가 두려워 눈물로 이별했으며 21년을 나와 상담하며 내 지시를 따르고 처방에 따라 하루하루를 지냈던 그녀이다.

지금도 내 귀에는 “선생님 언제면 다 나을 수 있을까요? 결혼할 수 있을까요?” 하는 그녀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다. 21년이라는 세월동안 그녀의 아픔과 고통, 정신적인 문제까지 진료의 영역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죽음의 그늘에 대해 생각도, 준비도 하지 않았으리라. 죽음을 계획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