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도 현실적인 이유로 용기가 없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100세의 노인 ‘알란 칼 손’은 용감하게 창문 넘어 도망쳤다. 무릎의 통증을 느끼던 노인이 슬리퍼를 끌고 650크로나(약 10만 원)의 돈이 든 지갑을 들고 양로원을 탈출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인생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은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는 법이다. 저자 요나스 요나손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란 작품을 통해 인생은 도전이며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눈부신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느 날, 여성 환자가 동행한 사람이 남편이 아닌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며 진료실에 들어왔다.
“원장님! 수년간 기침과 가래로 고생했습니다. 숨도 차고 쌕쌕 소리도 들리고 천식이라고 하는데 좋아지질 않습니다. 그동안 많은 병원엘 다녔지만, 호전이 안 되네요. 당뇨약은 먹고 있습니다.”라며 증상을 호소한다.
“네,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 해 나가도록 합시다.”
문진할 틈도 없이 이 환자는 계속해서 말을 쏟아낸다. 남자 친구의 진료를 부탁하며 종합검사도 해 달라고 한다. 나는 의구심이 생겼다.
작심하듯 자기의 인생사를 쏟아내기 시작한 그녀
정기적으로 진료실을 방문하는 그녀는 활기차고,
건강하게 변신해 가고 있다.
남자친구와 어떤 사이인지? 꼬치꼬치 물을 수도 없었다. 남자친구는 당뇨인데 약 복용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다. 나는 약물 복용과 식이요법의 필요성, 치료하지 않았을 때 합병증까지 설명하니 그제야 치료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녀 역시 고혈압, 당뇨에 대해 알려주고 운동과 함께 약 복용을 권했다. 남자친구는 주위 시선을 의식한 듯 수줍어했다. 그녀가 남자친구의 검사비용을 지불하자 난 속으로 ‘불륜 사이인가?’ 하고 의아해했지만 그동안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면서 어정쩡한 남녀관계의 환자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태연히 대했다.
어느 날,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혼자 진료실에 찾아 왔다. 그날은 작심하듯 한스러운 자기의 인생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집 와보니 신랑은 3살, 5살, 7살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그녀는 사기 결혼을 당한 셈이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한 결혼이라 포기하지 않았다. 시골 농가에서 호미를 들고 밭일부터 시작하여 온갖 궂은일은 다 하였다. 남편은 공사장에 다니며 일용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운 좋게 일감이 많이 생겨 건축 사업까지 하게 되었다. 술, 담배도 못하던 사람이 공사장에서 술을 배우고 성격이 난폭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열심히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뒤늦게 딸을 낳았다.
이제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가진 엄마가 되었지만, 남편은 갈수록 포악해지고 비위를 건드리면 기물파손까지 했다. 매도 많이 맞았는데 이 광경을 본 아이들이 충격을 받아 아빠를 멀리하게 되었다.
본부인, 즉 남편의 전처는 농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여 새엄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4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막내로 태어난 자기 딸에게 정성을 더 쏟을 법도 하지만 편애하지 않고 아이들을 똑같이 키웠다. 그 덕분인지 세 자녀는 이복 막냇동생을 사랑하였다.
그녀는 몇 번이나 이혼하려고 생각해 보았지만 자기가 떠나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다른 여자가 와서 아기를 낳게 되면 엄마가 3명인 이복형제가 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이혼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연신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웃 사람들은 아들 하나 낳으면 남편이 좋아질 거라며 아들을 낳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미 아들 2명이 있으니 더는 낳지 않고 아이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았다. 4명의 자녀는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고 잘 커주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외갓집에서도 그녀를 친딸처럼 대해주었다.
자신의 딸이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나 외손주들을 걱정하던 차에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으니 무척 고마워하며 그녀에게 ‘천사’라는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벌여 놓은 사업과 부채를 정리하고 자녀들도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이제 자식들은 결혼했고 남편이 남긴 재산도 똑같이 배분하였다. 그녀 역시 남편이 남겨 준 재산으로 노후를 지낼 수 있다고 한다. 자식들은 “엄마, 그동안 우리를 위해 고생 많이 했으니 이제 엄마 인생사세요”라고 하면서 여행비용을 모아 주는가 하면 “엄마도 좋은 사람 만나 앞으로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한단다.
나는 그녀의 기나긴 사연을 듣고 계모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새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한 여성으로 참 아름답게 인생을 살았다.’ 라고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녀는 힘들게 했던 남편과 살다가 인품이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나보니 딴 세상을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두 명의 딸을 가진 그는 착한 아빠라고 한다. 그들은 단지 외로운 마음을 달래며 친구로 지낸다는데 의지가 되는지 편안해 보인다.
정기적으로 진료실을 방문하는 그녀는 활기차고, 건강하게 변신해 가고 있다. 최근에는 몇 가지 자격증을 취득하여 봉사하러 다닌다고 행복해 하고 있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그녀가 대견스럽다.
요나스 요나손의 장편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100년 동안 무수한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노인이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양로원을 탈출하면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한다.
100세 생일날 슬리퍼 바람으로 양로원을 탈출한 알란은 모든 이에게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내가 만난 이 환자도 감옥 같은 인생에서 탈출하여, 창문 넘어 도망친 ‘칼 손’처럼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며 건강한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